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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박 Apr 09. 2023

철학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 에릭 와이너

이 책을 만나기 전에 나는 침대 위에서 마주하는 새로운 아침에 대해 무감각했다.

나는 질문에 당황했고 그에 대한 해답을 내놓는 것을 두려워했다.

나는 걷기를 좋아하지만 자주 걷지 못했고 모든 것을 다르게 보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으며 그 무엇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쉽게 쾌락에 빠지고 고통을 감내해 왔으며 무언가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는 나를 자책했다.

나는 다른 사람과의 충돌을 항상 회피해 왔고 친절하려 노력했지만 그것은 늘 어려웠다.

나는 항상 작은 것에서 오는 작은 행복감을 붙잡으려 했다.

나는 수많은 후회의 늪을 느리게 건너왔고 가끔 마주하는 역경에 쉽게 무너졌다.

나는 노년을 두려워했고 죽음에 무한히 슬퍼했다.


그리고 이 책을 전부 읽어내었다.

조그마한 확신이 든다. 나는 아주 조금일지라도, 확실히 변화했다. 내가 늘 어렵다고, 그 허무맹랑한 생각들이 도대체 나에게 무슨 조언을 해줄 수 있겠냐고 이야기했던 철학은 나에게 이것을 생각하라고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철학은 고리타분한 충고가 아니다. 비록 실체는 없지만 나를 충분히 이해해 주는, 나의 질문에 천천히 대답해 주는, 그리고 내가 쓰러질 듯싶을 때 나를 지탱해 주는 그런 존재이다. 오로지 나만 이해할 수 있는 나의 새로운 세계이다.



1 마루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침대에서 나오는 법

이른 아침, 침대에서 나오는 것. 5분만 더, 5분만 더를 속으로 수없이 되뇌며 지겹게도 울리는 알람을 끈질기게도 꺼버린다. 침대 위의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오늘 내가 해야 하는 행위들 때문일까, 나 자신의 또 다른 행복감을 고양시키기 위한 사명감 때문일까, 혹은 그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결단에서 오는 성취감 때문일까.


나는 절대로 아침형 인간이 아니다. 그렇게 되고자 하는 의욕도 없다. 적절한 수면과 적절한 휴식, 그리고 그 무거운 중력에 저항하여 곧게 섰을 때,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과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했을 때 오는 하루를 향한 만족감과 가벼운 성취감이 나를 그 따뜻한 이부자리에서 나오게 한다. 이불 위에서의 행복과 비슷한 것들이 오늘 하루 곳곳에 숨어있다.


2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

질문을 경험하는 것과 질문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궁금증이 해결되지 못한 채로 머릿속에 남아있다. 점점 더 파고드는 질문, 점점 근원으로 빠져들어가는 질문, 그리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한 질문은 나로 하여금 더 생각하게 하고 더 깊이 질문하게 하고 그만큼 깊이 빠져들게 한다.


끊임없는 질문과 대답, 한없이 깊어지는 질문의 두께를 상상해 보니 그것이 바로 질문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한 번만 생각해 보자. 모두가 인생의 성공을 좇고 있지만 그 성공의 모습이 결국 어떤 거냐고 묻는 질문에 누가 대답할 수 있을까.


3 루소처럼 걷는 법

걷기. 나는 걷기의 매력을 잘 알고 있다. 해가 저물어가는 낮과 저녁의 중심에서 살갗을 스치는 아주 적당한 온도의 바람이 부는 거리를 아주 천천히 걸어가는 그 느낌, 이상할 정도로 유쾌한 해방감과 내가 움직이고 있다는 동적인 느낌, 게다가 보기 좋은 풍경과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아, 오늘 하루도 정말 가득했다는 생각이 든다.


루소처럼 걸어보자. 치열하게 뛴 후에 심장이 쉬어가는 걷기도 좋고 늦은 밤, 답답한 마음을 부여잡고 나서는 걷기도 좋다. 걸을 때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이지만 어느 때부터 그 무엇도 보이지 않게 된다. 쉼 없이 생각의 꼬리를 따라가다 보면 시간은 훌쩍 지나있고 나는 어느새 메모장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간다.


4 소로처럼 보는 법

- 아름다움에 익숙한 사람은 쓰레기장에서도 아름다움을 찾아내지만 흠잡기 선수는 낙원에서도 흠을 찾아낸다. - p.130


보는 것은 그 어느 감각보다도 빠르다. 지금 여기서 한옥의 켜 너머로 들려오는 물소리와 나무 냄새가 이제야 인식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청각이나 후각, 그리고 촉각은 시각에 비해서는 인지되는 속도가 아주 늦다. 그래서일까, 인간은 시각이 쉽게 무뎌진다. 무디어지는 것, 아 이것이 보는 법을 알아야 하는 이유다. 너무 성급하게 눈앞에 보이는 것을 정의 내려서는 안된다. 그것을 규정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지만 그것의 정의 이전으로 시각과 생각을 돌려두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없다. 아니 그것은 절대적이지 않다.


5 쇼펜하우어처럼 듣는 법

듣다. 나에겐 꽤나 어려운 행위이다. 음악, 나는 그것과 거리기 멀다. 유명한 뮤지컬은 일부러 찾아가지 않고 유명한 클래식은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나는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한다. 꽤 부끄럽지만 나는 일상적으로 올라타는 버스나 기차 안에서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에 시선을 놓아둔 채 슬픈 멜로디와 그 위에 놓인 가사들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왜 가사가 없는, 그리고 다양한 악기들이 서로의 소리를 뽐내는 그런 음악들을 멀리하는 것일까.


- 음악과는 덜 계산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 음악에 대한 어떤 기대도 품지 않고 어떤 요구도 하지 않고 미학적 기쁨의 가능성에 문을 열어놓는 것이다. 진정한 듣기를 위해서는 판단을 유보해야 한다. 아무런 판단 없이 음악을 들을 때, 절대적 행복을 느낀다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 p.169


그래. 한번 들어보자. 그 음악들에 대한 어떠한 판단도 없이 그것들이 나에게 어떤 것을 전달하는지 한번 경험해 보자. 그것들이 나에게 전달하고 싶은 것이 아주 조금이라도 느껴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그것들에게 다가가고 싶지 않을까.


6 에피쿠로스처럼 즐기는 법

쾌락, 고통과 불안의 부재.

쾌락과 고통의 저울질 속에서 나는 항상 고민한다. ‘밥을 먹고 저기 있는 디저트를 사서 먹으면 분명 기분이 좋을 거야. 하지만 밥을 다 먹고 디저트까지 먹으면 분명 배가 너무 불러서 더부룩할 거야.‘라는 생각은 단순한 비교이다. 디저트를 먹음으로써 오는 쾌락과 그것이 주는 소화불량의 고통.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면 디저트에 대한 쾌락은 짧고 소화불량의 고통은 길다. 행복보다는 후회의 시간이 그만큼 더 길다.

 

그렇다. 선택, 결국 내가 항상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대부분의 문제는 선택에서 온다. 선택의 기로, 그 두 갈래길 위에서 항상 고민하며 힘들어하고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는 그만큼 더 괴로워한다.


8 간디처럼 싸우는 법

나는 늘 충돌을 회피한다. 충돌을 회피하기 위해 먼저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고 그의 입장에서 나를 생각해 보고 나의 행동을 도출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대부분 충돌로 이어질 수 있는(상대방이 불쾌해하고 나는 그것을 다시 불쾌해하는) 행위를 회피한다.


비폭력, 간디가 주장하는 비폭력은 다시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분명 실생활에서 우리는, 그리고 나는 상반된 입장을 표명하는 이들과 대척되는 지점에 서있을 때가 많다. 인도음식을 먹고 싶은 남자와 이탈리아 음식이 먹고 싶은 여자가 있을 때, 폭력으로 어떤 음식을 강제로 먹는 것, 내 것을 포기하고 상대방의 주장에 따라 맞추는 것, 또 다른 대안을 찾아내는 것과 같은 해결책은 진정한 비폭력이 아니다. 폭력이 베일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일 뿐이다. 대립되는 지점에서 나의 주장과 아집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상대의 주장과 고집 또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문제를 지엽적으로 바라보지 말고 좀 더 멀리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나는 인도음식을 먹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을 수도 있고 상대방은 인도음식을 먹은 것이 꽤나 예전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수도 있다.


9 공자처럼 친절을 베푸는 법

친절함이라는 단어가 꽤나 익숙하다고 생각을 했는데, 최근에 ’ 에브리씽에브리웨어올앳원스‘라는 영화를 봤을 때 가장 인상 깊게 들렸던 단어가 그것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친절함, 나는 그것을 온기라고 해석한다. 인간이 품고 있는 따스한 온도, 어떤 이는 뜨겁고 또 다른 이는 미지근하게 식어있을 수도 있지만 모든 사람들은 애초에 따뜻한 온기를 가지고 있다.


온기는 옮겨간다. 전이된다. 세상이 점차 차가워진다. 개인의 손길이 쉽게 닿지 않고 자연스럽게 온기는 고립되고 있다. 사회의 온도가 낮아질수록 그곳은 두려워지고 잔인해진다. 분명 나 이외의 온기에 따뜻함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한 번은 버스에 힘겹게 오르신 할머니를 미쳐 보지 못하고 의자 앞에서 꽃꽂이 서있었다. 의지할 곳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던 할머니를 보던 한 남자가 나를 부르더니 할머니가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게 비켜줄 수 있겠냐고, 마치 자신이 더 죄송스러운 표정으로 부탁을 했다. 순간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내가 부끄러워지더니 금방 그 남자의 친절함에 따뜻함을 느꼈다. 그 사람은 할머니뿐만 아니라 창피해 할 수 있는 나에게까지 따뜻함을 전달했다. 아, 그 따뜻함이 얼어붙어있는 마음 한켠을 순식간에 녹여버렸다. 창피함과 감동이 버스에 있는 내내 나를 자극했다.


10 세이 쇼나곤처럼 작은 것에 감사하는 법

- 목적지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여행과 목적지를 모르는 채로 떠나는 여행. 일단 펜을 들고 무엇이든 적어보는 것. 세이 쇼나곤은 자기 렌즈가 투명하고 깨끗할 수 있도록, 자신의 생각이 온전히 자신만의 생각일 수 있도록 치열하게 노력했다. -p.337


작은 것에 감사하는 것은 항상 어렵다. 나는 작은 것을 유심히 들여다볼 수 있도록 그것을 대부분 기록하려 하지만 삶의 작은 기쁨은 순식간에 사라지기 마련이고 그것이 나를 멈춰 서게 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그럼에도 그것을 인식하고 잠깐 멈춰 서고 짧게 기록하는 것을 멈출 순 없다. 분명 어느 한순간에 내리는 첫눈이나 시커먼 바다의 투명함, 비 오는 날 주말 아침의 기분 좋은 눅눅함 같은 것은 쉽게 사라지지만 그 작은 것들이 주는 행복을 기록해 둔다면 나는 그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될 것이고 그것들이 다시 찾아왔을 때, 그 행복을 온전히 다시 느끼게 될 것이다.


11 니체처럼 후회하지 않는 법

자, 가장 기대했던 부분이었고 가장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영원회귀,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토록, 다른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결함과 지루한 대화가 그대로 들어 있는 이 삶을 다시 살아가야만 한단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의 “최대의 무게”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네가 지금 살고 있고 과거에 살았던 이 삶은 너는 다시 한번 그리고 셀 수 없이 여러 번 살아야만 한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새로운 것이 없을 것이다. 저 사유가 너를 엄습한다면, 그것은 현재 있는 너를 변화시킬 것이며 그리고 아마도 분쇄해 버릴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 하나하나에 대해 던져지는 ‘너는 이것이 다시 한번 그리고 수없이 계속 반복되기를 원하는가?’라는 물음은 너의 행위에 최대의 무게로 놓일 것이다!”


아, 니체처럼 후회하지 않는 법은 영원회귀에 대한 사유가 없는 채로 그저 반복되는 삶 속에서 몰락의 길을 걷는 것이 아닌 사유를 받아들이고 그 반복되는 것들을 인지하고 변화하는 힘에의 의지를 가지는 것을 말하는 거였다. 후회를 한다는 것은 결국 영원회귀의 한 부분에 빠져있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나는 후회를 했다. 그리고 또다시 그 무한의 굴레 속에 나를 집어넣었다. 마치 니체의 이야기가 너무 어렵다고, 일단 지나가자고 마음먹은 후에 곧바로 후회를 한 것처럼. 이번엔 달랐다. 책을 덮고 메모장을 켰다. 니체를 검색했고 그의 생각을 다시 한번 읽었다. 아, 조금이나마 그를 이해했다. 반복되던 것이 아주 조금 뒤틀렸다.


12 에픽테토스처럼 역경에 대처하는 법

- 우리는 우리를 통제할 수 있을까. 사실 대부분 각자의 통제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사실 통제 밖에 있다.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과 성과를 ‘무관한 것’이라 칭한다. -p.404


“배가 난파됐을 때 난 정말 좋은 항해를 했어.”, 고난을 통해 강해지고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 스토아학파의 핵심 주제이다.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말이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면 외부사건(인상)에 대한 반사반응(최초정념), 인상에서 너무나도 당연하게 동의로 넘어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한다. 정념에 다른 이름을 붙여보자. 홀로 있을 때 느끼는 고독에 평온함이라는 이름을 붙여보자. 순식간에 일요일 저녁, 차가운 밤이 금방이라도 찾아올 것만 같은 그런 시린 고독이 저 주황빛 조명을 받아 따뜻한 평온함이 된다.


스토아학파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나는 이래저래 고민과 걱정이 참 많기도 하다. 책 속에서 작가는 비행기를 놓칠 것만 같은 상황에서 혼란스러워하다가 그것을 통해 잃을 것이 극히 적다고, 비행기 티켓은 ‘무관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내가 같은 상황이라면 나는 그럴 수 있을까, 분명 자책했을 것이다. 날씨를, 여행의 시기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를. 스토아학파는 좀 더 멀리서 지켜보기를, 그리고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어보길 원하는 것 같다. 너무도 당연하게 분노나 자책, 후회로 이어지는 생각의 흐름을 막아보자. 그리고 그것을 저 하늘 위에서 바라보면 결국 그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13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

노년은 스쳐 지나가거나 자연스럽게 다가오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과 충돌한다. 노화는 타인이 내리는 문화적-사회적 판결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렇다면 타인의 시선에 쉽게 휩쓸리는 사람은 그 판결에 더욱 강하게 충돌하겠지.


분명 나는 아직 물리적으로 충돌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미래의 충돌을 미리 걱정하고 있다. 나는 노화의 과정을 서서히 조여 오는 족쇄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과거가 빛이라면 미래는 어둠이고 내가 어둠으로 다가갈수록 내가 보는 것은 오로지 내 주변에서 점차 늘어만 가는 빛일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한번 나는 아직 물리적으로 충돌하지 않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 충돌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도 빛과 어둠이 있고 미래 역시 빛과 어둠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상처는 입더라도 금세 순응하고 ‘아, 또 다른 어둠이 지나갔구나’하고 생각하며 그 앞에 놓인 또 다른 빛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는 것이다.


14 몽테뉴처럼 죽는 법

- 내가 태어나기 전의 비존재는 내가 죽고 난 뒤의 비존재와 동일하지 않다. 하나는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비존재이고 다른 하나는 한 때는 존재했던 비존재이며 이것은 크나큰 차이를 낳는다. -p.483


역시나 죽음 앞에서는 얼어붙는다. 그래서 나는 잠이 쉬이 오지 않는 새벽, 자주 얼어붙는다. 누군가의 죽음을 떠올리는 것과 나의 그것을 떠올리는 것은 언제나 슬프다. 나는 내가 노화라는 벽에 충돌하지 않았지만 그것을 걱정하는 것처럼 죽음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그 방법은 무던히도 노력해서 그것에 대한 관심을 저 멀리로 떨어뜨려놓는 것일까, 혹은 죽음 이외의 것들로 삶을 가득 채워놓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을 정면에서 직시하는 것일까, 무한한 허무함에 무릎을 꿇는 것일까.


그렇기 때문에 철학에 더욱 관심이 간다. 나는 확신하지 못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그것이 어떤 방향성을 제시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내가 했던 걱정과 고민, 두려움과 공포는 분명 과거의 많은 이들이 이미 경험했던 것이고 나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충분히 괴롭혔을 것이다. 그들은 분명 그러한 감정에 대해서 생각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되었다.


몽테뉴는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 모든 지혜와 이론의 핵심은 결국 바로 이것이다. 우리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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