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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박 Apr 10. 2024

여덟째 주의 밤들

2024.02.19-25


감정의 총천연색

240219


열렬히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그리움, 시간이 흘러서 이미 옅어져 버린 그리움, 다시는 볼 수 없는 이에 대한 그리움, 과거에서부터 불어오는 향수에 대한 그리움.


하나의 감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수많은 가지들이 뻗어 나가 있다. 그리움은 다 같은 그리움일 수 없다. 사무치게 슬픈 그리움이 있고 아주 잠깐의 꿈처럼 옅어져 가는 그리움이 있고 다시는 볼 수 없는 이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이 있고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에 대한 그리움도 있다. 그리움의 깊이에 따라 다르고 대상에 따라 다르다. 깊고 슬픈 그리움이 얕게 반짝이는 그리움이 되기도 하고 오래 보지 못한 어떤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다시는 보지 못할, 아주 막연한 그리움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런 감정들에 대해 적어내기 시작한다면 얼마나 많은 색을 발견할 수 있을까. 각각의 감정들이 이렇게나 많은 천연색을 지니고 있는데 말이다.


바다와 우주

240220


좋아하던 것이 두려워진 적이 있던가. 내가 싫어하는 것은 파랗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아주 시커먼 바다, 어디서 끝날지 전혀 알 수 없는 무한한 우주. 내가 좋아하는 것은 파랗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아주 투명한 파도, 중력에 이끌려 행성의 곁을 떠나지 않는 위성. 그리고 내가 두려워하는 상상은 투명한 파도의 근처에서 시커먼 바다로 떠내려가는 것, 행성의 중력이 사라져서 위성이 점점 뒷걸음질 치다가 이내 사라지는 것.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사이에는 특별한 경계가 없다. 바다의 투명함은 금세 검게 물들고 행성을 맴도는 위성은 시커먼 우주의 한가운데에 내던져져 있다. 그래서 나는 두려워한다. 투명한 파도와 서성이는 위성의 알 수 없는 따뜻함과 친밀함이 자신을 속이는 검은색과 만질 수 조차 없는 검은색의 무한성에 의해 멀어지고 잠식당하는 것을.


철새는 오래도록 날아가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240221


현실과 꿈, 사랑상태와 이별상태, 일상과 일탈. 저울처럼 솔직하고 일정한 상태는 이상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시계추처럼 혼란스럽고 반복되는 상태로 살아간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흔들리는 우리. 꿈속에선 현실을 바라고, 바라지 않는다면 깨어나기 싫어도 현실로 되돌아와 버린다. 현실에선 꿈을 원하고, 원하지 않는다 해도 꿈속으로 내던져진다. 사랑을 하고 있어도 늘 이별에 불안해하고 이별의 상태가 지속되어도 어느샌가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 여행을 떠나도 나를 잡아끄는 향수에 뒤를 돌아보고 꽉 막힌 일상 속에서는 어딘가로 훌훌 떠나버리고 싶다. 어딘가에 오래 매어있지 못하는 우리. 철새는 익숙함을 못 견뎌서 오래 날아가는 걸까, 아니면 날아가면서도 익숙함을 그리워할까. 우리는 익숙함을 못 견디는 걸까, 아니면 잠들고 깨어나면서 익숙함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시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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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으로, 시력이 안 좋으면 좋은 점이 있다. 세상을 흐리게 볼 수 있다는 것, 늘상 보는 뚜렷한 일상을 두 가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눈이 온 후의 풍경을 흐린 눈으로 쳐다보면 갑자기 하얀 눈만 보이게 된다. 도시와 그것의 울퉁불퉁한 높이는 사라지고 평평해 보이는 새하얀 눈밭만 남는다.


밤이 된 후의 풍경을 흐린 눈으로 쳐다보면 갑자기 형형색색의 빛만 보이게 된다. 역시나 밤하늘을 가린 높은 도시는 사라지고 부유하는 빛방울만이 남는다.


계절의 끝에서

240224


퇴근하는 길, 여기저기에 보였던 눈사람들이 어딘가로 사라졌다. 흥건한 물웅덩이를 보고 있자니, 정말 겨울의 끝자락에 서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겨울의 끝에서 모든 눈과 눈꽃과 눈사람, 그 무해한 하얀색들이 사라지고 있다. 봄의 끝에서는 새롭게 움트는 것들의 눈부심과 그것들이 내뱉는 향기들이 사라질 것이고 여름의 끝에서는 짧은 밤과 들떠버린 마음들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가을의 끝에서는 바스락거리는 발바닥과 천천히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여운이 사라지겠지. 누군가는 다가올 계절을 기다리겠지만 나는 지나갈 계절을 되돌아본다. 그것들이 내게 준 감정을 품에 안고 3개월 남짓한 하나의 계절을 놓아줄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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