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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의 밤 Sep 03. 2021

01_드럼을 치는 이유

드럼을 치기 싫은 이유


매주 수요일 드럼 레슨을 하러 간다. 당연히 레슨을 받는 쪽이다.

매주 놀랄 만큼 가기가 싫어서 ‘아 이번 달만 하고 그만둬야지.’라는 생각으로 6개월 째다.

얼마큼 가기가 싫냐면 레슨은 오후 8시에 가는데 오후 3시부터 불행해지기 시작해서, 시간이 다가올수록 얼굴이 죽상이 된다.

나의 드럼 선생님은 정말로 좋은 분이 시다 못해, 이렇게 나에게 잘 맞춰주는 사람이 있을까, 나 같은 형편없는 제자에게 이렇게까지 칭찬하고 격려하는 스승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나게 한다.

도대체 가기 싫은 이유가 뭘까. 왜 가기 싫은 걸까. 내 돈 내고 내가 배우면서 왜 혼자 난리 부르스일까 생각해보면, 아마도….

부끄러워서인 것 같다.


내 속에 엄청나게 많은 내가 있는데 초등학교 2학년까지 “세상만사 부끄러운 애”가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다른 사람한테 말 거는 것도, 선생님한테 질문하는 것도, 화장실 가겠다는 말을 꺼내는 것도, 버스를 타는 것도, 전화로 짜장면을 시키는 것도 모두 부끄러워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용기를 내서 말을 하려고 하면 염소 같은 목소리가 나왔고, 생일잔치에서 주목을 받는 것도 너무 창피했다. 어른들이 예쁘다고 안아주면 그것도 너무 부끄러워서 바다처럼 멀미가 났다.


하루는 유치원에서 생일잔치를 했는데, 당시엔 지금으로써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문화가 있었다.

생일 주인공인 친구들이 뽀뽀를 받고 싶은 (이성) 친구를 지목해서 모든 친구들 앞에서 뽀뽀를 받는 것이었다.

맘에 드는 친구도 없었거니와 뽀뽀를 받는다니… 애들 앞에서… 현기증이 나서 그냥 옆집 사는 남자애를 골랐는데, 그 순간이 얼마나 치욕스러웠는지 25년이 지난 아직까지 기억이 난다.




그러다 초등학교 3학년 즈음부터 내 속에 ‘유쾌하고 적극적인 애’가

“도저히 못 봐주겠네. 저리 비켜봐” 하고 운전대를 잡기 시작했다.

원래 그 나이 애들은 그렇게 확확 바뀌는지 모르겠지만 운전수가 바뀐 내 성격은 완전히 바뀌어서 그야말로 다른 사람처럼 살았다. 학교 축제만 열리면 나가서 사회를 보고, 전교생 앞에서 쫄쫄이 티셔츠 입고 춤을 추는 건 일도 아니었다.


드럼을 처음 치기 시작한 건 중학교 1학년 때였는데 그때 정말 오랜만에 다시 샤이(shy) 한 내가 나왔다.


무엇보다 드럼은 박자 악기라서 반주가 없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게 정말로 부끄럽다.

음정이 있는 피아노보다 침묵을 깨는 게 너무 부끄러워 어디론가 숨고 싶을 지경. 소리는 또 왜 이렇게 큰 거야.

그런데 밴드에서는 드럼의 역할이 너무 중요해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전체가 엉망이 되어 버린다.

어째서 드럼만 치려고 하면 샤이한 버전이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어렵게 들어간 밴드부도 탈퇴했고

성인이 되어서 간간히 합주를 해야 할 때도 식은땀을 흘리면서 쳤다.


그러니까 그때보다 더 성인이 된(?) 지금도 드럼칠 생각만으로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그럼 안 치면 되는데 또 내돈내산으로 레슨은 열심히 받는다.

역시나 너무 부끄럽고, 그 순간을 부끄러워하는 나 자신이 또 부끄러운 대환장 파티.




그 대환장 파티장에 왜 매주 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거창한 이유가 없다.


가장 큰 이유는 처음엔 도저히 안되던 박자를 어느 순간 치게 되는 것이 너무 좋아서.

처음엔 ‘바보가 아닐까’ 생각이 들만큼 손발이 따로 놀다가도 될 때까지 하면 결국엔 된다.

더 나은 사람이 된 것도 아니고, 그 정도의 기술을 어디다 써먹을 것도 없지만 ‘그 박자를 못 치던 사람’에서 ‘그 박자를 치는 사람’이 된다는 그 이유만으로.


또 다른 이유는 위의 경우보다 훨씬 더 희박한 경우 때문인데, 드럼을 정신없이 치다 보면 그야말로 박자 안에서 자유롭게 유영하고 있을 때가 있다.

악보를 보지 않아도 춤을 추듯이, 말을 하듯이, 바이크를 타듯이

박자를 타고 있는 딱 그때.

그때는 하나도 안 부끄럽고 정말이지 너무너무 즐겁다.


그 찰나의 순간. 왜 이렇게까지 찰나인지 모를 정도로 찰나인 순간을 기대하면서 레슨을 간다.

그런 순간을 만난 날은 레슨실을 나오면서부터 목소리가 씩씩해지고, 어깨춤이 나온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 동네 최고의 드러머가 되겠어..!’


그리고 정확히 일주일 뒤 오후 3시부터 다시 불행해지는 것이다.

나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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