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하의 밤 Jan 29. 2022

재택근무하다가 별 본 날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은 기분. 그것이 바로 재택근무하는 자의 심정이다.    


-



그날도 어김없이 거실 테이블에 앉아 일을 하고 있었는데, 유난히 졸음이 쏟아졌다. ‘왜 이렇게 졸리지..’라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자꾸만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하나 남은 임신 테스트기를 했는데... 희미한 두 줄이 보였다.

찐으로 임신이었다.


임신을 알게 되는 순간의 기분에 대해 수십 번, 수백 번 상상해봤는데 실제로 경험해보니

역시나 너무나 얼떨떨하고, 동시에 흥분이 돼서 창문 열고 동네방네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


“세상 사람들!!!!!!!! 저 임신했어요!!!!!!” �


그리고 진짜로 알려야 할 사람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남편, 엄마, 가까운 친구들, 산부인과 선생님(?), 그리고.... 회사!


‘회사에 알려야 한다!’


염치없게도 임신을 확인하며 최근에 느낀 피로함, 무력감의 정체를 알게 되자 하루라도 빨리 단축근무를 하고 싶어졌다. 마침 근처에 임신한 친구들이 많아서 임신 초기와 말기에 단축근무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떠오른 것은 얼마 전 우리 셀의 셀원이 했던 말이었다.


“와 박하님까지 임신하면 대박이겠다.”


그때의 ‘대박’은 여러 가지 의미의 대박이었는데, 일단 좋은 의미는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 셀의 리더는 무려 애가 셋인 애국자 아이 아빠인데, 얼마 전 셋째가 예정일보다 일찍 태어나게 되면서 갑작스럽게 출산 휴가를 쓰게 됐다. 워낙 평소에 혼자서 많은 일을 하고 있기도 했고, 갑작스럽게 휴가에 돌입하다 보니, 여러 셀원들이 업무를 나눠서 했음에도 충분한 인수인계가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모두에게 긴 시간이었다.


예상치 못한 휴가에 리더도 당황하고 미안해했지만, 아이가 일찍 태어난 것을 어떻게 하겠는가. ‘괜찮다, 가정에 충실하셔라.’라고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종종 업무 관련 질문을 해야 하는 우리도 미안해 어쩔 줄 몰랐다.


그 폭풍의 한가운데서, 나 역시 임신을 준비하고 기다리며 매달

‘이번엔 진짜 임신 같다.’

는 상상임신 드립을 날리고 있었는데, 그런 나를 보며 셀원 중 한 명이 했던 말이 바로 저 말이었던 것이다.


“와 박하님까지 임신하면 대박이겠다.”

그러니까…. 따지고 보면 워낙 바쁘고 정신없었을 시점에서 ‘지금 당신까지 임신하면 정말 정신없겠다!’ 정도의 말이었겠지만 공교롭게도 괜히 그 말 때문에 셀원들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는 것이 주저됐다.

‘난색을 표하면 어떡하지? 아냐 임신 준비하는 것 알고 있었잖아. 그래도 좀 싫을 수도 있겠네. 이제야 좀 정리가 됐는데. 아니야, 같은 여자니까 이해해주겠지…’

사실은 그렇게 한참 고민해봤자 소용이 없었다.


임신과 출산이란 어찌 생각하면 가장 자연스럽고, 축복을 받아야 할 일이기도 했고

동시에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보다 회사! 인사팀에 알리는 것이 우선이었다.


다음날 회사에 가서 인사팀장님이 오시기를 기다렸다. 그가 짐을 채 푸르기도 전에 면담을 신청했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 유난... 어휴 죄송합니다.)


“똑똑- 저 잠시 1분만 시간 내주실 수 있나요?”

“네 그럼요!”


(회의실)


“아 사실 제가 임신을 했어요! ^_^”

“와아 정말요, 축하합니다!”


…. (정적)



“음 그래서… 제가 임신 초기 단축근무를 신청하고 싶은데요”

“아!! 그러시군요!! 네네 당연히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제가 한 번 정확히 확인해보고 개별 메시지 보낼게요!”

“네 감사합니다!”



-



아까 그 정적 뭐였지.......?

괜히 말한 건가. 임신하자마자 득달같이 달려와서 단축근무 요청이라니.

그래 좀 뻔뻔해 보였겠지. 혹시 나 단축근무에 환장한 애처럼 보였을까.

아니 잠깐만, 나 이렇게 눈치를 많이 보는 애였나?! 임신한 게 뭐 어때서!!



하는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던 것도 잠시..


오후가 되자 왜 인사팀장님이 나의 말에 당황을 했는지 알게 됐다.

우리 회사에 구성원 중 임신을 한 케이스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구성원 평균 연령보다 살짝..? 많은 편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암만 봐도 나 말고 가임기 여성이 꽤 있어 보였는데.......(?) 내가 처음이었다니!!


회사에서도 구성원이 임신을 한 것이 처음 있는 사례다 보니 무언가에 대해 물어보면 곧바로 답을 주지는 못했지만, 최대한 빠르게 협의를 통해 막 만들어낸 듯한 따끈따끈한(!) 정책들을 공유해주고 했다. 

이후로도 감사하게 여러 가지 배려를 해주어서, 무사히 12주까지 단축근무를 할 수 있었다.


당연히 나의 걱정이 무색했을 만큼, 셀원들의 축하와 축복도 한 몸에 받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임신은 진짜 ‘대박’이다.



얼마 전 한 커뮤니티에서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렇게 열심히 살지 말 걸 그랬다."는 제목의 글을 봤다.


죽어라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남들보다 더 열심히, 부지런히 대외 활동해서 좋은 회사에 들어갔는데 임신과 출산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퇴사를 했고, 지금 매일매일 육아에 시달리고 있는 자기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비참하다는 짧은 글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렇게 열심히 살지 말 걸.’


이 말을 생각할수록 마음이 쓰고, 불편해서 며칠 동안 되뇌고, 또 생각했다.

아이를 낳고, 기른다는 것.

한 사람에게, 그리고 한 가정에게, 그리고 한 사회에 너무나 귀중하고 존엄한 일임에도

매일매일 육아의 전쟁터 안에 있는 누군가에게는 ‘이럴 줄 알았으면...’이라는 말로밖에 표현이 안될 만큼

지치고 막막한 일.


그리고 그것 때문에 과거의 열심을 원망하고, 부정하는 것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어떤 회사가 좋은 회사인가, 어떤 복지가 정말 필요한 복지인가.

어떤 구성원이 좋은 구성원인가에 대한 문제는 늘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개인이 과거의 열심을 후회스럽지 않도록 하는 회사를 다니고 싶다.

조금 더 욕심내서 미래의 열심까지도 응원하는 회사였음 좋겠다.


‘아 열심히 살기 잘했다.’

‘최선을 다해서 지금까지 지내와서 다행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도록.

작가의 이전글 회사를 다니며 이루고 싶은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