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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의 밤 Jul 02. 2021

회사를 다니며 이루고 싶은 것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아빠는 돌아가신 뒤였다.

오빠가 나에게 새벽에 전화를 했을  이미 돌아가셨으나, 오는 길에 사고라도 날까  말을 하지 않았다고.

6인실 한가운데 누워있는 아빠의 모습은 어제와  엊그제와 크게 다르지 않아 그냥 자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빠의 손은 차가웠지만 얼굴은 비현실적으로 평안해 보였다. 죽은 사람의 몸을 만지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생각했는데 오히려  모습이 최근 어느 때보다 평화로워 보여 안도감이 느껴졌다. 몸이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다는 사실로써 아빠의 죽음을 인정했다.


슬픔을 받아들일 겨를도 없이 장례를 준비해야 했다. 당장 병원 장례식장에 자리가 없어 다른 병원으로 이송해야 했는데 이런 일이 처음이라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회사에서 상조 서비스를 제공해준다고 했는데... 상조 회사가 어디더라... 이 시간에도 전화하면 받을까.

상조회사에서 죽은 사람도 옮겨주려나.'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리가 굳어가는 것 같았다. 미안함을 무릅쓰고 친한 총무팀 직원에게 전화를 했지만 자는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결국 인사팀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네 OO님"

"아 팀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그.. 아버지께서 돌아가셔가 지구요"

"아이고.. 그러셨군요..."

"그런데 제가 이런 일이 처음이라.. 아버지를 다른 병원으로 옮겨야 할 것 같은데 어쩌죠"


지금 생각해도 송구스럽고 죄송스러운데 그때는 정말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새벽 3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인사팀장님은 바로 상조회사에 연락해주겠다며 전화를 끊었고, 조금 지나자 상조회사 직원과 연결되어 아빠를 무사히 다른 병원으로 옮길 수 있었다.


그 이후로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수의는 무엇으로 할지, 재단의 꽃은 어느 정도 사이즈가 좋은지, 손님 대접 상의 반찬은 몇 가지로 할지, 도우미 아주머니는 몇 명을 고용하면 좋을지, 상복 사이즈는 몇인지, 장지는 어디로 정했는지.

모든 것이 처음이라 이럴 때 아빠가 있으면 참 결정을 잘해줄 텐데 하고 생각했지만 그럴 때마다 '아 이건 아빠의 장례식이지' 하는 생각에 자꾸만 눈물이 났다.


숨 가쁘게 모든 결정을 마치고 상복까지 갈아입으니 아침 8시였다.

이 시간에 누가 오겠어했지만 제일 먼저 찾아온 존재가 있었다.

회사에서 보내준 화환이었다.


화환. 세상 쓸데없고 돈 아깝다고 생각했던 그것. 그런데 이 날은 무척이나 반갑더라.

사람들이 이래서 화환 보내는 거구나. 사람보다 크고, 오래 서있을 수 있어서, 빨리 올 수 있어서. 무엇보다 딸 회사에서 보내준 화환이니 아빠가 참 좋아하겠다.


생각해보니 여태껏 회사를 다니며 두 번의 장례를 치르고, 한 번의 결혼을 경험했다.



우리 회사 경조사 지원 내용에는


'힘들 때 돕는 친구가 진짜 친구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힘든 일이 생겼을 때 누가 가장 먼저 달려 올까요?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일까요?
바로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가 가장 먼저 달려갑니다
 힘든 일을 겪고 나면 나와 연을 맺고 있는 세상과 관계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고, 내가 회사라는 귀중한 공동체 속에 있음을 동료들의 정을 통해 느낍니다.기쁘고 힘든 일이 생겼을 때 회사가 함께하겠습니다. 기쁜 일은 진심으로 축하하고, 힘든 일은 그 누구보다도 빠르게 달려가 함께 나누겠습니다


라는 내용이 있다.

동 떨어져 있을 때는 '뭐 이렇게까지 친한 척을.. 부담스럽게.'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수혜자가 되어보니 솔직히 눈물이 핑 돌만큼 고마웠다.


인생을 살아갈 때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마음 중에 하나는 '빚진 마음'이 아닐까 늘 생각했다. 내가 누군가의 수고와 양보로 이 자리에 있다는 것, 나를 가르친 수많은 사람들의 참음으로 밥벌이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그 빚진 마음으로 회사도 다니고, 사람도 만나고, 세상을 살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회사를 다닐 때는 솔직히 쉽지 않다. 수시로 '내가 뭘 그렇게 빚졌길래?'라는 마음이 올라온다.


회사를 오래 다니고 싶으면 빚을 내면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던데, 나의 경우에는 그보다 다른 것들이 효력이 있었다. (어차피 내가 받는 월급으로는 만족이 안된다.) 힘들고 어렵고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 버티게 해준건 착착 들어오는 월급이 아니라 오히려 빚진 순간들, 갚지 않고는 못 견디게 만드는 좋은 동료들.

실수 투성이었던 어느 하루를 '오늘도 너 때문에 살았다. 너무 수고했어."라는 말로 재구성해줬던 선배들.

그 빚진 마음이야말로 수시로 고개를 드는 나의 자만과 건방짐을 누를 수 있다.




아빠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 어느 날, 회사에서 일을 하다 평소 친해지고 싶던 옆 팀의 팀장님과 메신저 대화를 나눴다. (팀장님의 취미도 오토바이를 타는 것이었다.) 대화를 나누며 팀장님의 아버지께서 몇 해전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날 처음 메신저 대화를 나눈 것이었는데 취미로 시작해서 가족 얘기까지 이어지자 마치 이자까야에서 맥주 한 잔 시켜놓고 마주 보고 앉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 둘 다 각자의 모니터 앞에 앉아 한참을 울었다.

그로부터 몇 주 뒤에, 팀장님에게 밥을 먹자고 용기를 냈다. 퇴사라도 하는 줄 알고 긴장된다는 팀장님께 '사실 우리 아빠도 아프시고 그래서 너무 슬프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게 다였다. 위로나 걱정보다도 보고 싶었던 것은 아빠라는 커다란 세상을 잃은 사람도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습, 그냥 똑같이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었다. 팀장님에게도 아직 아픈, 아물지 못한 상처와 기억을 끄집어냈다는 이기심보다도 '그래도 정말 살아지는 것 맞나요? 어떻게 그 순간을 준비하면 좋죠? 그리고 대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야 괜찮아지나요?'라는 질문의 답을 얻는 것이 절박했다.


삶에서 일어나는 어떤 종류의 불행은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게 만든다. 그 점 때문에 다른 종류의 슬픔보다 제곱만큼 힘들다. 아빠의 죽음은 그런 종류의 불행이자 슬픔이었지만 나도 팀장님처럼 살고 있다. 아무렇지 않은 얘기를 하며 웃다가 갑자기 울기도 하고, 뜻밖의 물건이나 타이밍 때문에 눈물이 쏟아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당연히 세상은 돌아가고 나도 그 속에서 살아진다. 어쩌면 그날 내가 빌린 건 팀장님의 시간과 눈물이 아닌 뒷모습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빠가 돌아가실 것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예상하면서도 막상 그 순간이 닥치기 직전까지 철저한 준비를 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장례식장에서도 밤이 되면 노트북을 켜고 못다 한 일을 하고, 동료들에게 틈틈이 인수인계를 남겼다. 나 때문에 피해를 주는 것 같아서. 빈자리를 채우느라 고군분투하는 것이 미안해서. 다시 돌아가면 그러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위해 그 정도의 헌신을 해줄 준비가 됐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때도 나만 몰랐을 뿐이다. 많은 동료들의 헌신으로 그 시간을 온전히 애도의 시간으로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의 빚진 마음을 야금야금 먹으며 여태껏 살아간다.



회사를 다니며 '뭘 이루고 싶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뭘 이루고 싶은 건 없고

그냥 한 사람이 살면서 겪는 크고 작은 일들을 겪고 싶다.

임신을 하고 싶고, 출산을 하고 싶고, 아이가 필요할 때 달려가 주고 싶고, 사랑하는 강아지가 떠났을 때도 애도할 시간을 충분히 갖고 싶다. 없었으면 좋겠지만, 앞으로도 있을 몇 번의 장례도 잘 치르고 싶다. 회사를 다니면서.


그리고 그 빚진 마음으로 나와 같이 누군가의 멈춘 시간도 충분히 메워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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