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관리자 일지 2
원단이나 가죽으로 만드는 모든 재봉류들은 대부분 본격 생산에 앞서 제일 먼저 ‘재단’이라는 과정을 겪는다.
예를 들어, 백팩을 만든다고 하면 백팩에서 원단이 차지하는 크고 작은 부분, 안쪽의 작은 주머니, 안감이 들어가는 부분, 어깨끈과 연결된 부분 등을 모두 철형이라는 원단 칼로 잘라낸다. 엄청나게 크고 무거운 쿠키 틀 같은 걸로 원단을 찍어내어, 가방 모양으로 조각조각 내는 것이다.
이것들을 각 공정에 맞춰 여러 '밑 작업장'에서 만들어낸 다음에 '최종 임가공 업체'에서 미싱으로 합봉 하는 과정을 거친다.
당연히 복잡한 가방일수록 여러 밑 작업장을 거치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우리가 발주를 넣는 업체는 최종 임가공 업체이고, 임가공 업체 사장님(이하 ‘사장님’이라 칭함)은 재단된 상태의 원단을 가지고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 밑 작업장에 뿌린다.
라벨만 다는 밑 작업장,
안감 작업만 하는 밑 작업장,
지퍼와 원단을 연결하는 밑 작업장,
지퍼 손잡이만 만드는 밑 작업장,
가방 뒤집기만 하는 밑 작업장이 다 따로 있다.
당연히 이 모든 작업장이 한 동네에 모여있는데 얼마나 구석구석에 많은지, 언뜻 보기엔 일반 가정집인데 문을 열면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대부분 간판도 없고 업체명 같은 것도 없다.
이 모든 밑 작업장을 책임, 감독, 관리하는 것은 사장님의 역할이지만 본사에서 현장관리를 나온 우리도 생각보다 현장을 자주 나간다.
밑 작업 단계부터 작업이 잘 되고 있는지 꼼꼼하게(깐깐하게) 확인하기 위함이다.
업체들이 워낙 구석구석 골목에 숨어있기 때문에 차보다 오토바이가 편했다. 운이 좋게 내가 자란 동네가 생산 공장들이 흩어져있는 바로 그 동네(거나 바로 옆 동네)라서 굳이 아침에 회사를 갔다가 현장에 나올 필요가 없었다.
출근하기 전 스쿠터를 타고 현장 한 번 싹 돌고, 문제가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다. 문제가 없으면 회사로 출근하고 문제가 발견되면 업체 사장님을 불러서 밑 작업장에서 해결을 보면 된다.
작업물에 문제가 있어 사장님을 부르면, 사장님도 오토바이를 타고 금세 현장에 도착한다.
- 나(민주임) : 이게 이렇게 동그랗게 만들어져야 하는데 너무 각졌다니까요. 이게 이 가방에서 포인트인데.
- 사장님 : 아이씨 뭐 이런 것까지 보고 그래? 김 씨! 이거 조금만 동그랗게 해봐 봐
- 미싱사 김 씨 : 아니 이게 그렇게 둥글게 나올 수가 없는데?
- 사장님 : 이게 그렇게 나오기가 힘들어 민주임
- 나 : 사장님이 만들어준 샘플은 동그랬잖아요.
- 사장님 : 그건 한 개니까 그렇게 한 거고, 대량으로 할 때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 나 : 그런 게 어딨어요! 우리는 그거 보고 발주한 건데.. 사장님 똑같이 만들어주세요. 저 혼나요.
- 사장님 : 아니 그럼 지금까지 만든 건 어떻게 해?
- 나 : 다 뜯어야죠! 저거 못 써요!
- 미싱사 김 씨 : 아니 이걸 어떻게 다 뜯어! 그럼 일정 못 맞춰!
- 사장님 : 그냥 쓰면 안 되냐 민주임?
- 나 : 아 이건 물어볼 필요도 없이 안될 것 같은데... 그냥 이럴 시간에 같이 뜯죠 사장님. 몇 개 안되는데
- 미싱사 김 씨 : 몇 개 안되긴! 여기도 있는데! (우르르르)
대부분 이런 식이다 보니 현장에서 본사 직원이 환영받을 리가 만무하다. 욕만 안 했지. 눈으로 할 수 있는 욕, 한숨, 고성이 오가는데.... 미싱일을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 넘게 하던 분들에게 나처럼 새파란 본사 직원은 성가시고 피곤한 존재일 수밖에.
그나마 팀장님이랑 같이 가면 수월한 편인데 어느 날은 팀장님과 현장에서 작업물을 가지고 옥신각신하다가 미싱사가 “더 이상은 못해!” 하고 바닥에 물건을 집어던지고, 그대로 집에 가버린 적도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무리한 요구를 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오랫동안 같은 일을 하시던 분들에겐 어쩔 수 없는 관성이 있고, 쉽고 편하게 일하고 싶은 안일한 마음은 금세 제작 사고로 이어진다. 현장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제품의 퀄리티도 점점 떨어지고, 그것은 결국 매출과도 연결되는 문제기 때문에 본사와 작업 현장이 상생하기 위해서 피곤하더라도 현장을 제대로 관리해야 한다.
우리나라 제조업은 나이를 먹고 있다. 늙는 만큼 느려지고, 투박해진다. 시장에 중국이나 동남아 OEM 제품이 많아질수록 ‘이거 국산 제품이에요. 다 한국에서 만든 메이드 인 코리아!’라는 말이 메리트를 얻는 것 같지만, 어디까지나 퀄리티가 좋을 때의 일이다. ‘그래서 뭐? 중국산만 못한데?’라는 말이 많아질수록 현장 작업자들이 설 자리는 줄어든다. 특히, 재봉 쪽은 디테일한 미싱 작업이 요구되기 때문에 아버지 같은 사장님들이 눈 앞에 뻔히 잘못 사용한 실 색깔도 못 알아볼 때는 정말로 가슴이 아프다.
늘 일하던 방식이 아니라 계속 발전하고 성장해가야 본사와 현장 모두가 상생할 수 있다.
그래야 “이거 메이드 인 코리아예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현장에서 피곤하도록 참견하고 간섭하는 일들은 ‘우리가 함께’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맞닿아 있다.
현장에 계신 분들이 모두 오래 일을 하기를 바란다.
“지금 카카오에서 파는 가방. 몇 만개 그거 다 내가 만들었다”는 말.
“잘 나갈 때는 일본의 제일 유명한 미싱 회사에서 큰 차를 타고 다녔다”는 말.
“내가 이 미싱 기술 하나로 아이들 먹여 입혔고, 대학교까지 보내 결혼시켰고, 이젠 걔가 대기업 다닌다”는 말. 듣고 또 들어도 좋으니 동네 골목에 그 말들이 떠돌아다니길 바란다.
귀를 때리는 커다란 미싱 소리도, 핑계도, 사고 치고 나 몰라라 하던 표정들도 모두 지긋지긋했지만
전날까지 질리도록 싸웠으면서 날이 덥다며 비타 500 하나씩 꼭 챙겨주고, 오토바이 위험하니까 차 타고 나오라는 잔소리를 하고 “저 결혼해요.”라는 소식을 전했을 때 환하게 웃으며 축하한다고, 꼭 가겠다고 하는 활짝 핀 사장님들의 얼굴이 어쩐지 더 많이 기억난다.
지금은 비록 현장에 없지만, 그래서 하는 말이겠지만, 싸우고 버티던 날들이 이젠 다 ‘좋은 날’ 같다. 추억이 지나치게 미화되다 못해 심지어 가끔은 그리울 정도다.
퇴사를 한 지금도 스쿠터 타고 지나다니다가 현장 문이 활짝 열러 있는 날이면 꼭 들려서 반가운 인사를 나눈다.
얼마 전에도 스쿠터를 타고 집 근처를 돌아다니다
‘재단 집 사장님 안 본 지 오래됐는데 한 번 들려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재단 집 사장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야말로 우리 팀에게 명불허전 최종 보스, 빌런, 화병 유발자였다.
원단 재단을 하기 위해 롤로 된 원단을 넘길 때, 원단에 불량이나 계산 실수 등을 염두에 두고 실제 필요한 양보다 조금씩 여유분을 더 계산해서 넣어주는데 비싼 원단일수록 사장님은 자꾸 재단이 모자라다고 전화를 했다. 분명히 넉넉하게 더 넣었는데 매번 부족하다고 하니 재단 과정을 지켜볼 수도 없고 답답해 미칠 지경.
게다가 원단을 끝까지 다 풀어서 사용하고 나면 나오는 종이 롤 마대(아주 기다란 휴지 심지처럼 생겼다)가 있는데, 사용하고 남은 마대를 다시 가져와야 다음번에 원단을 본사에서 출고할 때 사용할 수 있었기에 일정 수량이 쌓이면 본사 직원들이 회수하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마대가 없다고, 딱 잡아떼는 게 아닌가. 출고해준 건 있는데 회수할 것은 없다니. 자꾸만 사라지는 원단과 마대의 행방을 궁금해하며 부글부글 끓기만 하던 어느 날, 우연히 원단 업체에 갔다가 우리 원단 자투리와 마대가 쌓여있는 것을 알게 됐다. 아마도 알뜰살뜰하게 재단을 해서 남는 원단, 마대를 되팔이 하는 것 같았다.
와 이럴 줄 알았어. 이제 여기랑은 끝이야! 하고 재단 업체를 옮겼다
라면 좋았겠지만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다. 명확한 증거도 없었거니와 그렇다고 다른 업체에 맡기기에 사장님의 재단 실력이 너무 뛰어났다. 예순이 넘는 연세에도 목소리는 또 얼마나 크고 기운은 얼마나 넘치는지 무거운 재단 물도 번쩍번쩍 들어 나르고, 수량도 정확하게 딱! 딱! 계산해서 묶어주고 분류해주고, 아무튼 작업만큼은 야무지게 해 주시는 분이었다. 아니라고 잡아떼는 목소리도 얼마나 큰지.
뭐 어쨌든 사고 없이 재단을 잘해주시니까. 15년을 넘게 같이 했으니까. 지지고 볶고 미워도 다시 한번, 이번만 다시 한번. 헤어지지 못하는 남자, 떠나가지 못하는 여자처럼 질긴 인연을 이어가면서 또 그놈의 미운 정이 들었다.
그냥 말하는 건데도 목소리가 너무 커서 화내는 것 같았던 사장님. 왜 화를 내시냐고 하면 어색하게 웃으면서 화내는 게 아니라 원래 말투가 이런 거라며 머쓱하게 말씀하시던 사장님. 빨리 해달라고 부탁을 하면 안 된다고 바쁘다고 하면서 결국 다 해주는 진정한 츤데레. 화끈하게 싸우고 뒤돌아서 뒤끝은 없던 상남자.
임팩트가 강했던 만큼 그리운 걸까. 재단 집 근처를 지날 때면 어김없이 사장님이 생각났다.
‘오늘만 날인가, 비올 것 같으니까 다음에 찾아가지 뭐.’
‘왠지 오늘 가면 말이 길어질 것 같군. 다음에 가지 뭐.’
25년간 그 자리에서 같은 일을 하셨으니까 내일도 다음 달도 어차피 계실 거니까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만남을 미루던 어느 날 처음으로 사장님의 카톡을 받았다.
얼마 전까지 2G 폰을 쓰시던 사장님의 첫 카톡은
부고장이었다.
[부고] 고 김 OO 님께서 2021년 05월 xx일 별세하셨기에 삼가 알려드리옵니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사모님은 사장님의 영정 사진 앞에 우릴 세워두며 울부짖었다.
“여보, 디자인 회사 직원들이 왔어요. 아이고 세상에 그렇게 보고 싶다고 하더니... 아이고아이고”
먼지가 많이 나오는 원단 재단 작업을 공기도 통하지 않는 습한 지하에서 너무 오래 한 탓에 사장님의 폐는 이미 오래전에 완전히 망가져버렸다고 했다. 그래도 다시 일하고 싶어 하셨다고. 같이 일하던 시절이 그립다고. 사장님이 마지막으로 대접하는 밥 맛있게 먹고 가라고. 와줘서 고마워하실 거라고.
그렇게 미웠는데, 그렇게 지겹게 서로를 욕하고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것처럼 싸우던 사이었는데 누구보다 악착같이 알뜰하게 일하셔서 오래오래 사실 것 같았는데.
육개장을 사이에 두고 티미(팀장님)와 눈물을 뚝뚝 흘렸다.
“티미, 우리 마대 가지고 싸웠을 때 있잖아요.. 그거 마대 줄걸 그랬어요 그렇죠.”
“응 그냥 줄걸. 그거 가지고 그렇게 싸웠다 진짜..”
그리고 자꾸 사모님의 말이 생각났다. 우릴 보고 싶어 하셨다는 말. 그거 진짜일까.
진짜로 우리 보고 싶고, 우리랑 다시 일하고 싶으셨을까. 지긋지긋하고 귀찮지 않았을까.
다시, 같이 일 하고 싶다는 말이 이렇게 슬프고 아픈 말이었나.
오늘도 스쿠터를 타고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재단 집 기계는 멈췄지만 그보다 많은 미싱이 돌아가고 있고 수작업은 이어지고 있다.
30년을 넘게 살았지만 어쩌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우리 동네 곳곳의 미싱 소리. 치열하고 피곤하고 지루하게 돌아가는 가방 봉재 골목. 모두가 사장님이고 대표님이고 여사님인 이상한 가방 공장.
그들이 자주 고집을 부리고 화를 내고 가끔 거짓말을 하면서 무조건 안된다고 잡아떼더라도,
그래도 역시
오랫동안 미싱 소리가 들렸으면 한다.
자식들 대학 보내고 결혼시킨 그 기술로
손주들 학교도 보내고, 용돈도 주고, 결혼도 시키고.
또 그 손으로 유명한 대기업 가방도 몇 만개씩 만들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