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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하의 밤 May 27. 2021

무슨 일 하세요?

생산관리자 일지

무슨 일 하세요?

네 번째 회사를 다닐 때, 누가 무슨 일 하냐고 물으면 "저는 다이어리랑 가방 만드는 일을 해요."라고 답을 했는데 그러면 십중팔구 "아 디자이너세요?"라는 질문이 따라왔다. 나는 디자이너도 아니고 미싱사도 인쇄소 직원도 아니고, 생산관리 담당자였다.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디자인 문구 회사의 제작기획팀에서 약 4년 간 근무했는데, 다이어리, 가방 제작이 주요 업무였다.


(오늘은 이 중에서 다이어리 제작과 관련된 일에 대해 적어보려고 한다. 생산관리자가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디자인 문구 회사를 다니는 것이 꿈이었던 나처럼 누군가에게는 동경이고 미지의 영역일 수 있으니...  도움이 되거나 흥미롭거나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 일을 하기 전까지 ‘생산관리자 (Product Supervisor)’ 라는 직업이 있는 줄도 몰랐다.  

디자이너들이 제품의 커버, 내지 등을 기획하고 디자인하고 나면 우리 팀은 그 기획대로 실제 제품이 나올 수 있도록 여러 생산 업체에 외주를 맡기고 품질 관리를 다녔다.

연 말, 연 초가 되면 이곳저곳에서 판촉물로 다이어리들이 쏟아져 나오지만 사실 다이어리를 제대로 만드는 일은 보기보다 복잡하고 오래 걸리는 일이다. 보통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개월 이상도 걸리기 때문에 긴 호흡을 갖고 이끌고 가야 하는 일종의 프로젝트다.

사고는 언제, 어디서든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 미리 종이도 수급해두어야 하고, 실제 종이가 인쇄소에 제대로 들어갔는지 확인도 해야 한다. 인쇄가 시작되면 컬러가 제대로 나오는지, 오타는 없는지 인쇄 감리를 가고, 인쇄 후에 진행되는 제본, 후가공, 부착 작업도 현장에서 일일이 확인해야 한다.


문제는 품질 관리 작업이 거의 참견, 감시 수준이라 반가워할 생산 공장은 거의 없다는 점. 그렇다고 손 놓고 맡길 수는 없기에 매번 초대받지 않은 손님처럼 업체를 드나들고 기웃거려야 했다. 한 권의 다이어리를 만드는 일이라고 해도 여러 업체, 사람의 손을 거쳐 만들어지기 때문에 조금만 방심해도 사고가 났다. 우리가 보기엔 명백한 불량인데, 생산처에서는 '불량이 아니다, 이 정도면 그냥 써도 된다.'라고 해서 옥신 각신 하는 일이 일상적이었다.


현장에서 실수나 사고가 발견되면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 빠르게 수습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해야 했다. 일정은 늘 초반의 계획했던 것보다 늘어지기 일쑤였고, 생산처와 본사가 납득하고 수용할만한 수습 지점을 찾는 것도, 그것을 위해 이해관계를 가진 담당자들을 설득하는 것도 지난한 과정이었다.


4년 동안 다이어리를 만들면서 정말 별별 생산 사고를 경험했고, 또 열심히 수습했다. 인쇄소에서 감리하는 단계에서 오타가 발견되어 전체 재 인쇄를 돌리는 건 그나마 수습하기 쉬운 일이었지만, 인쇄 후 제본 단계에서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고, 이미 포장을 끝내고 판매가 시작된 시점에서 오타가 발견된 적도 있었다. 분명 열 명이 넘는 사람이 검수를 하고, 쥐 잡듯이 뒤져 오타를 찾아내고 '최종_최종_최종 데이터'를 만들어냈는데 인쇄된 내지에는 마법처럼 월요일이 두 번 적혀있고, 공휴일이 검정 숫자로 뒤바뀌어 있었다.


한 번은 사무실에 출근을 해서 직원들과 커피를 마시며 평화로운 아침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매장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직원이 사색이 된 얼굴로 말했다.

"지금 웃을 때 아니에요.. 저희 다이어리 오타 났대요." 사무실은 초상집이 됐고, 모두 뿔뿔이 자리로 돌아갔다.




짧지만 무거운 회의가 이어졌다. 이미 매장에 깔린 다이어리를 전량 회수하고 폐기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였기에 어쩔 수 없이 오타 부분에 부착할 작은 스티커를 만들어서 다이어리에 동봉하여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결정이 난 순간부터 생산을 담당하는 우리 팀은 분주해진다. 새끼손가락 한 마디보다 작은 스티커를 만드는 일도 어찌나 복잡하고 예민한지, 이미 만들어진 다이어리 위에 붙였을 때 위화감이 없도록 스티커 배경색, 글자 색, 소비자가 직접 떼기 쉬운 형태 등을 고려해서 제작하고, 사과의 의미로 함께 보낼 사은품까지 만들어서 포장해야 했다. 중요한 것은 역시 속도.

인쇄소에 사정사정해서 속전속결로 수정 스티커를 만들고, 입고가 되지 마자 전 직원이 커다란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이미 많은 시간과 비용을 사용했기 때문에 아르바이트 생을 고용하는 건 사치다. 테이블에 모여 앉아 기계처럼 일을 하기 시작한다. 이미 포장된 다이어리 포장지를 까고, 수정 스티커를 동봉하고, 다시 포장하도록 랩핑 기계를 태우고, 그 위에 바코드 스티커를 붙이고, 다시 그것을 큰 박스에 옮겨 담아 매장으로 보낼 준비를 하고...

그렇게 몇 백권, 몇 천권의 다이어리를 재포장하고 나면 ‘와 이게 되는구나. 이게 돼...’라는 탄성이 나오고, 다 끝났다는 해방감도 잠시, 금세 내년 다이어리 제작을 준비하는 시즌이 온다. 이렇게 각종 사건 사고를 수습하면서 진정한 제작팀원으로 거듭난다.

내가 생각했을 때 다이어리를 만드는 회사에 다니는 가장 큰 장점은 1년이 정말 빨리 지나간다는 것이다. 항상 6개월 정도 앞서 살기 때문에 미래 지향적으로 살 수 있다. 보통 새해를 맞이하면 새해 연도가 입에 잘 붙지 않는데, 당연히 그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두 번째 장점은 모든 제품이 만드는 ‘과정’을 알게 된다는 점이다. (너무 내밀한 과정까지 알게 된다는 점에서 좀 피곤 하긴 하지만) 그 전까진 한 권의 다이어리가 그토록 많은 과정을 거치는지, 하나의 가방이 그렇게나 많은 미싱사의 손을 타는지 전혀 몰랐다. 사실 다이어리를 만드는 회사를 들어가면 교보 문고 다이어리 매대에 있는 각종 다이어리의 샘플 페이지 꾸미기나 하는 줄 알았다.




다이어리를 만드는 회사에 들어갔던 이유는 당연히 다이어리를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다이어리뿐 아니라 기록하는 행위, 다이어리를 꾸미는 시간이 좋았고, 디자인 문구 회사가 만드는 문구류와 그것을 파는 공간의 분위기와 냄새가 좋았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지친 날은 나를 달래기 위해 교보 문구를 찾아 몇 시간이고 디자인 문구 제품을 구경했고, 작은 문구류들을 판매하는 문구점이나 잡화점에 가면 몸 구석구석의 세포가 살아나는 것 같았다. 책장에는 해마다 설레는 마음으로 샀던 다이어리들이 배가 볼록해진 모습으로 꽂혀있었고, 자라면서 변하는 나의 디자인 취향을 관찰하거나 다이어리에 빼곡히 적힌 사사로운 기록들을 다시 읽는 일도 즐거웠다. 변변한 취미가 없거나, 지나치게 많았던 나에게 ‘여러 문구 브랜드 제품을 사용하고 소유하는 일’은 가장 오래 유지된 취미였다.


제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아는 것은 다른 의미로 제품을 소유하는 일이었다. 종이가 나무일 때의 사정은 모르지만, 적어도 다이어리가 종이였던 시절을 거슬러 유추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점이 좋았다.

하지만 그 부분에서 회의감이 들었다. 그동안 양품을 만들기 위해 너무 많은 종이를 버렸고, 퀄리티를 유지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흠이 있는 제품은 쉽게 ‘불량’으로 취급해버렸다. 어떤 근사한 다이어리를 보더라도 ‘이걸 만들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종이를 버렸을까’라는 생각이 자꾸 따라왔다. 일정 희생과 시행착오 없이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무엇이 좋은 제품이지?’라는 질문이 시작되자 나는 더 이상 다이어리를 사지 않게 되었다.

지금은 조금 다른 입장이긴 하지만 당시만 해도 ‘내가 사지 않는 제품을 만들고 판다고? 말도 안 돼.’라는 생각이 내 중심을 잡고 흔들었기 때문에 결국 그것은 퇴사를 결정하는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작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엄마는 우는 일이 많았고 나는 우는 엄마를 달래야 하는 순간이 많았다.

어느 날은 우는 엄마에게 “엄마, 우리 교보문고 가서 다이어리 살까?”라고 했다. 엄마는 눈물을 잠시 멈추고 “다이어리? 그럴까?”라고 했다. 다이어리를 사는 일은 여전히 누군가에게 설레는 일이고 위로구나.


사실 엄마도 나만큼 기록, 다이어리를 좋아한다.


엄마의 다이어리를 고르며 정말 오랜만에 「다이어리 기획전 매대」를 구경했다. 요즘 누가 다이어리를 쓰냐는 말도 많이 듣지만, 막상 보니 모르던 신생 브랜드도 많아졌고 다양한 판형, 사이즈의 다이어리들이 매대에 가득해서 이 작은 시장이 얼마나 치열한지 느낄 수 있었다. 전 직장의 다이어리를 찾아보는 오랜만에 샘플 페이지를 구경하는 것도 재밌었다. 그리고 엄마가 “이거 꼭 너 전 회사 다이어리 같다.”라고 하길래 보니 정말 너무나도 비슷해 보이는 제품이 있었다. (그것보다 놀라운 건 엄마가 그걸 기억하고 알아챘다는 점)


카피 제품이 생겼다는 것은 골치 아픈 일이지만, 어떤 의미에선 다행스러운 일인가? 분명한 것은 좋은 제품이라는 의미겠지.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기까지 그 과정 어딘가에 내 피땀눈물이 있다는 것을 굳이 확인하고 싶은 유치한 마음이 들지만, 누군가에게 확인받지 못해도 알고 있다. 내가 한 때 사랑했던 다이어리가 여전히 누군가의 사랑을 받고 있단 사실을. 그래서 그때의 나와 우리의 치열함이 낭비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리고 나도 여전히 다른 형태의 마음으로 기록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속 편한 제본소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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