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나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그가 뚫어져라 쳐다봅니다. 친구가 나가고 나서야 그의 시선은 제게 머물렀습니다.
-정희가 없으니까 하는 얘긴데, 지난번에 봤던 내 친구 알지? 걔 이상형이 딱 정희라는 거야. 걔가 나한테 맨날 하는 말이 있어. 너랑 나는 여자 보는 눈이 달라서 싸울 일은 없겠대. 그러면서 갑자기 나한테 정희랑 친하게 지내지 말라대? 본인이 어떻게 좀 해볼라는 거지. 근데 생각해 보면 또 웃겨. 그 자식 때문에 내가 얘랑 친해지지 말아야 돼?
오늘도 그는 제 앞에서 다른 여자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의 눈빛, 표정, 말투, 행동 하나하나가 넌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있는데…. 저는 또 바보같이 그 사람 입에서 나오는 다른 여자의 얘기를 들어주고 있었네요. 어쩌면 그는 겉으론 아닌 척하면서도 이미 제 친구를 마음에 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 저 역시 아닌 척, 똑같은 미소를 지어야겠죠. 이윽고 정희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리고 그녀가 자리에 앉기 전 그는 제게 마지막 당부를 합니다.
-이거 정희한텐 얘기하지 마. 괜히 신경 써.
저는 가만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습니다. 정희, 예쁜 얼굴과 털털한 성격으로 모든 남자에게 호감을 사는 친구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역시 그녀에게 마음을 준 듯합니다. 그렇기에 정희가 부럽긴 했지만, 그러면서도 그녀에게 향한 그의 마음을 애써 부정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이 사람, 제 앞에 앉아있는 남자. 첫인상이 참 별로였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던 사람. 제가 많이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잘 맞는 성격은 아니었어도 함께 있으면 이상하게 알 수 없는 감정이 자석처럼 끌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정희와 저, 그 이... 이렇게 셋이 만나는 자리가 많아졌고요. 그러면서부터 어느 순간 저는 그를 아주 많이 좋아하고 있었나 봅니다.
하지만 아마도 그는 제 마음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이건 저 혼자서만 느끼는 마음이니까요. 말하지 않고, 티 내지 않으면 절대 알 수 없는 짝사랑이니까요. 마음이 눈에 보이지 않아서 정말 다행인 것 같습니다.
정희가 돌아오자 그가 담배를 피우고 오겠다며 자리를 뜹니다. 맥주만 마시는 사람이, 술 좋아하는 제 친구 앞에서는 항상 소주잔을 들고는 하네요. 본인도 힘들어하면서.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친구가 말합니다.
-어우, 취한다. 연섭오빠 짱 웃기지 않냐? 진짜 미쳤어.
-응. 너 전화 온다.
-어, 윤종오빠네? 여보세요? 오빠-
친구는 요즘 만나고 있는 남자가 생긴 듯합니다. 그 이 역시 이 남자의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알면서도, 아니, 알기에 더욱 본인의 마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는 걸지도요. 그가 들어옴과 동시에 정희의 휴대폰이 꺼졌습니다.
재킷을 걸치기엔 아직 이른 날씨인가 봅니다. 여기저기서 꽃들은 피고 있는데, 겨울 한파가 아직 풀리지 않았는지 약간의 으스스함이 느껴집니다.
-우연아, 택시 타고 갈 수 있지? 정희가 많이 취한 거 같아서, 나는 데려다주고 갈게.
-저도 같이 갈까요? 오빠 혼자 힘들 텐데.
-아니야, 먼저 가.
웃으며 말하는 그의 표정에 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가 대리기사를 부르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먼저 반대길로 걸음을 돌립니다. 같은 동네 살면서... 같이 가면 어디가 덧나는 건지,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어 눈물이 납니다. 오늘도 나보다, 그녀를 향한 그의 마음이 너무 잘 느껴져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습니다.
이 길을 언젠가 한 번은 그와 함께 걷게 되는 날이 올까요?
저는 언제나 짝사랑만 하는, 바보 같은 여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