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 회사에 남아 있는가

by 공부하는 꽃사슴

과거, 회사생활은 정해진 목적지로 향하는 기차 여행과 같았습니다.

운이 좋으면 일등석 티켓을 받아 편안히 이동했고, 운이 나쁘면 조금 불편한 좌석을 배정받았지만.

그러나 분명한 건 적어도 어딘가로 향하고 있고, 굳이 기차에서 내릴 이유가 없었다는 겁니다.


오늘날 이 여정은 근본적으로 달라졌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다른 꿈과 목표를 향해 자신만의 속도와 방식으로 나아가길 원합니다.

어떤 이는 빠른 성장을, 다른 이는 일과 삶의 균형을, 또 다른 이는 전문성을 원합니다.

회사도 더 이상 같은 티켓을 나눠주지 않습니다.

직원들도 한번 올라타면 내리기 애매한 기차를 반기지 않습니다.

기차보다 더 멀리, 더 길게 여정을 계획하는 개인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자신이 탈 기차가 원하는 목적지로 향하는지,

그리고 그 여정이 자신을 얼마나 성장시킬지 꼼꼼히 살펴봅니다.



그래서 질문하게 됩니다.
“나는 지금 어느 기차에 타고 있는가?”
“이 기차는 내가 가려는 곳으로 가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타고 있을 뿐인가?”


이직이 유행처럼 번지는 시대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여전히 같은 자리로 출근합니다.
사직서를 내진 않았지만, 마음은 이미 몇 번이나 회사를 떠났다가 돌아옵니다.
떠나지 않았다는 건 남아 있기로 한 게 아니라, 아직 완전히 결정하지 못한 상태일지도 모릅니다.
나도 당신도 지금 그 회사에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를 스스로에게 설명하라면, 당신은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난 25년간 회사의 의무는 33개에서 21개로,

구성원의 의무는 22개에서 8개로 줄었습니다.

이제 회사도, 개인도 약속의 범위를 좁히고 있습니다.
관계보다는 성과, 정서보다는 명확성이 중심이 된 것이죠.


서로가 기대하는 범위가 좁아지면서, 관계는 더 이상 신뢰의 문제라기보다 선택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회사도 사람을 남길 이유를 따지듯, 개인도 머물 이유를 스스로 정의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죠.

그렇다면 남아 있음의 이유 역시 조직이 아니라 ‘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무엇을 얻고, 왜 머무는지를 스스로 명확히 할 때,
남아 있음은 체념이 아니라 ‘전략적 선택’이 됩니다.


남아 있음의 이유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경제적 계약 때문입니다. 매달의 급여가 삶을 지탱하고, 안정이 불안을 대신합니다.
또 누군가는 사회적 계약 속에 남습니다.
오랜 동료, 익숙한 공간, 나를 알아주는 관계들 때문이죠.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는 정체성의 계약 속에 머뭅니다.
“그래도 이 일은 나다움을 증명해 주는 일이다.”
이 세 가지 계약이 서로 얽히며, 우리는 매일 출근이라는 선택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남아 있다는 것이 더 이상 충성의 증거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무너졌고 ‘남아 있음’은 헌신이 아니라 전략이 되었습니다.
당장은 옮길 확신이 없거나, 지금의 위치에서 얻을 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죠.
남음은 일종의 유예입니다. 그러나 그 유예가 길어질수록 마음은 점점 조직으로부터 멀어집니다.
‘회사에 다니지만 회사와는 다른 속도로 사는 사람들.’
이제 남아 있는 사람들조차도, 마음속에서는 이미 다른 계약서를 쓰고 있습니다.



앞서 숫자로 확인한 심리적 계약의 변화는

이제 커리어라는 것은 회사가 제안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그려야 할 설계도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줍니다.

조직이 제안하던 길이 사라지면서, 심리적 계약의 상대는 ‘회사’가 아니라 ‘나 자신’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저마다 자기와의 계약(Self Contract)을 쓰고 있는 셈입니다.

‘이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 나는 어떤 성장과 의미를 얻을 것인가?’
‘이 관계가 나의 다음 여정에 어떤 자산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이 새 계약의 조항이 됩니다.


남아 있음이 체념이 될 수도, 전략이 될 수도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어떤 의도로 머무르느냐에 따라,

이곳은 ‘소진의 장소’가 될 수도 있고 ‘다음 여정을 준비하는 정류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퇴사를 인생의 전환점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더 중요한 건 ‘남아 있는 동안 어떤 계약으로 일하고 있는가’입니다.
몸은 회사에 있지만, 마음은 이미 다른 계약서 위에 서 있는 사람들.
그게 오늘날 직장인의 가장 현실적인 초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다시 묻습니다.

“나는 왜 이 회사에 남아 있는가?”
“이 선택은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가, 붙잡아두는가?”

그리고 다음 화에서,
이 질문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회사가 더 이상 책임져주지 않는 시대라면,
이제 회사가 아닌, 나 자신과의 계약이 시작되어야 하니까요.

화, 목,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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