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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510 비운의 프로그램 <걸크러시 야구단>

by 대나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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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크러시 야구단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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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저기 보여 주며 제작비 영업했던 기획안들... 이것들이 누출 된 것은 아니겠지 ㅠㅠ


공부는 더 잘하는데 가난한 집안 환경 때문에 대학을 못한 학생이 좋은 집안 출신의 친구가 대학을 가서 흥청망청 사는 모습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걸크러시 야구단>이라는 비운의 프로그램 기획안이 있었다. 2019년부터 여자들의 생활체육 활성화를 목표로 준비하던 프로그램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여자 생활체육 + 야구’라는 매력적인 아이템이었다. 성공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고 구체적인 실행 방안도 있었다. 하지만 돈이 없었다. 묘하게 우리 회사는 아무것도 안 하는 직원들이 행복한 시스템이다. 뭔가를 해야 한다면 더 노력해야 하고 더 욕먹는 결과를 감내해야 한다. 열정 가득한 20대 청춘을 무기력한 중장년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이 회사의 목적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아무튼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서 드는 제작비는 모두 기획자가 구해 와야 한다. 뭐 돈이 일~이백 하는 것도 아니고 10여 억을 만들어야 정규 16부작을 할 수 있는 정도다. 그러니까 노력하지 말고 그냥 죽은 듯 월급이나 받으며 사는 게 가장 현명한 길이 맞긴 하다. 하지만 난 아직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프로그램 만들고 싶어 여기저기 제안서 돌리기 영업을 뛰던 그 어느 날 벌어진 일이다.

청천 벽력같은 일이 벌어졌다. 내가 1년 이상을 준비하고 열심히 펀딩을 위해 뛰고 있던 와중에 M사에서 비슷한 프로그램을 론칭한 것이다. 여자가 야구하는 콘셉트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고 출연한다는 사람도 거의 중복되다 보니 내가 2년 이상 준비한 기획은 카피켓이 되어버렸다. 분명 내가 먼저 준비했고 내가 더 많이 노력하여 기획했다. 더 큰 문제는 <걸크러시 야구단>은 외부 협찬을 받아야 진행이 되는데 타 프로 카피의 경우 협찬 받는 게 거의 불가능했다. 실제로 연고지 유치와 협찬금 지급을 긍정적으로 논의 중이던 지자체 A에서 손을 뗀다는 연락을 받았다. 결국 <걸크러시 야구단>은 좌초되고 말았다.

억하심정이 아니라 타사에서 한 여자야구 프로그램은 성적이 나쁠 거라 예상했다. 야구라는 종목의 특성상 남자도 단기간에 배워서 할 수 있는 스포츠가 아니다. 그래서 난 오랫동안 사회인 야구를 한 여자 선수들이 주인공이고 방송용으로 유명인 몇 명을 섭외하려고 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남자들의 리그에 가입해 1년 동안 시즌을 치르는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 타사 프로그램의 패착은 여자 선수들이 주인공이 아니라 유명인들이 주인공이고 선수들이 조연이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방송으로 포장 해봐도 못하는 것은 못하는 것이다.

나에게 <걸크러시 야구단>는 내 회사의 현실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그쪽 피디는 분명 나처럼 제작비 영업을 하진 않았을 터..., 그리고 <걸크러시 야구단>은 나에게 실패의 반면교사이다. 나 역시도 완벽히 준비된 상태에서 프로그램 론칭 하려다 타인에게 선점당하는 실수를 범했다. 그래서 이번 <청춘야구단>은 먼저 론칭하고 추후 정교하게 다듬는 방법으로 진행하려고 한다. 무엇보다 <걸크러시 야구단>은 나에게 아픈 손가락이다. 더 재미있게, 더 의미 있게 만들 수 있는 아이템이 망쳐지는 과정을 보는 쓰라리고 아픈 손가락이다.

이 아픈 과정이 과거형이 아니라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것을 오늘 알았다. 타사 프로그램이 시즌 2로 돌아온다고 한다. 이번에는 일반인 여자 야구선수들을 모집해 전국 대회에 나간단다. 그리고 유튜브를 통해 먼저 공개된 몇몇 영상들도 봤다. 내가 후보군에 두었던 사람들이 대거 출연했다. 속이 너무 쓰리다. <청춘 야구단> 본 방송 전에 야구 유튜버들에게 사전 공개 영상을 보여주려는 계획도 똑같았다. ‘먼저 하는 것’은 선점하는 것이다. 시작은 내가 먼저지만 완성하지는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그 사이 다른 이는 완성했고 세상에 나왔으며 그 아이템은 그 사람 것이 되었다.

비운의 프로그램은 <걸크러시 야구단>으로 끝내자. 이젠 내가 먼저 런칭하자. 완벽히 준비되지 않았어도 일단 시작하고 세상에 보여주자, 그리고 차근차근 업그레이드하자. 비록 아픈 손가락이지만 다음을 위한 자양분으로 삼자. 반면교사로 삼자. 원래 최종 목표는 <청춘 야구단>이었고 <걸크러시 야구단>은 최종 목표를 향한 테스트용이자 스핀오프가 아니었던가. 일단 하자. 그게 내 결론이다. 일단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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