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별 Sep 01. 2015

[사랑] 안녕, 잘 지내지?

지난 사랑은 점점 바래고 잊힐 뿐, 채워지지 않는다

J와 나는 대학교 친구였다. 아니, 정확히는 전국 연합동아리 행사에 참여하며 둘 다 활발한 성격에 죽이 잘 맞아 스무 살 여름 이후 십여 년 간 끊일 듯 끊이지 않게 연락하며 지내왔다.


그런 J가 오랜만에 연락을 했다. 당신이 생각하는 바로 그 이유, 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너도나도 막차를 타고 있는 친구들의 결혼 소식이 이제 지겨울 법도 한데 나는 꽃처럼 미소가 예쁜 그녀의 결혼만큼은 참 반가웠다. 진심으로.



오랜만의 카톡을 하며 그녀가 어떤 사람을 만나 미래를 약속하게 되었는지 혼자 상상하기도 하고, 내가 알고 있던 그녀의 최근 연애를 떠올리며 어떻게 이어질까 업데이트를 기다리게 되었다. 친구 사이에 근황 토크 중 베스트는 역시 연애사 아닌가? 그 죽일 놈의 사랑(람)만 아니라면 ㅎㅎ


어쨌든 아주 잠깐 다른 생각을 한 것 같은 일주일이 훌쩍 지나 미리 예약했다는 용산 쇼핑몰의 한 식당에서 J를 만났다. 창가 자리의 전망도 좋았고 음식도 맛있었다. 무엇보다 친구인 날 생각하며 예약을 했다니 더 고마웠다. 계집애...


한 접시 얼른 비우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새 신부답게 어딘가 모르게 살짝 야윈 얼굴로 5년 간의 공백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나도 부어냈다. 드글드글 냄비 안의 참기름에 볶은 소고기와 미역처럼 다른 곳에 있다 서로 만나 끝내 맛있는 미역국 만들듯 하하호호 웃으며 근황을 주고받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직장 이야기를 나눌 때가 어제 같은데, 우리는 어느 새 직장을 바꾸고 연애 상대며 사는 곳이 바뀐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나누고 있는 것이다. J가 대학을 와 처음 만나 참 질기게도 만났던 아이, 내가 만났던 사람의 이야기도 우린 쓴웃음을 지으며 곧 구워서 먹어치울 고깃거리마냥 소금까지 뿌려두며 척척 얹어두었다. 이젠 따갑기보다는 좀 간질간질하지 뭐. ㅎㅎ 그나저나 그 고기들 이젠 구울 차례인가?


"사람이 빈 자리는 사람이 채우는 것 같아."


뭔가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냥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사람처럼 툭- 말을 놓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J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이럴 땐 정말 앞뒤 문맥을 잘라먹고 그 어떤 분위기와 뉘앙스만 기억하는 내가 정말 얄밉다. 그래서 내가 드라마 실컷 보고 사람들에게 이야기도 잘 못하고 그러나 보다.)


"아냐. 그 사람이 빈 자리는 그 사람만 채울 수 있어."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맞다. 그랬지... 갑자기 놓아버린 정신줄을 잡으려고 나는 몇 초간 허우적거렸다.



내가 수많은 밤을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거나, 차를 마시거나, 나쁜 놈! 욕을 하며 술을 마시거나 향초를 피우며 멍하게 잠겨있을 때에 이따금씩 하나 둘 다른 날에 다른 얼굴들이 떠올랐었다. 물론  밤뿐만 아니라 낮에 밥을 먹거나 길을 걷다가, 창을 바라볼 때에도 생각났었고, 사람들과 우스갯소리를 나눌 때에도 뜬금없이 나타나 픽-하고 영문 모르게 혼자 웃게 만들었었지.


지나간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사랑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의 얼굴이 기억나는 것도 아니지만 오랜만에 자전거를 타도 씽씽 달리는 것처럼, 찬물에 뛰어들면 저절로 팔다리를 휘적이며 물 위에 떠오르는 것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바래 진 기억이 구겨진 종이를 손으로 쓱쓱 문질러 펼쳤던게 너무 여러 번이었던 걸 나는 잠시 잊고 있었던 거다. 참 끈질기기도 하지.


J는 스무 살에 만난 질긴 그 아이를 완벽하게 놓지 못한 자신을 짧은 침묵으로 드러냈고 나 또한 그녀를 따라 내 마음에 비워진 구멍들을 내보이며 동의했다. 헛헛했다. 하지만 그녀가 한 사람의 아내로 출발하는 길을 축하하는 자리이니 다른 약속 없이도 우리는 우리끼리 이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이게 딱히 비밀은 아니고 뭐랄 것도 없으니.



두어 시간이 지나 집으로 돌아가는 전에 내가 물었다.


"결혼 선물은 뭘 받고 싶어? 내가 해줄게."


"하얀 레이스 속옷! 나 한 번도 안 입어봤어. 네가 사준 거 입고 여행 갈게."



내 친구가 이렇게 예쁘다. 수줍다. 나한테 고백한 것도 아닌데 얼굴이 붉다.

열 몇 해전 그녀와 친구한 내가 참 기특했다.


그 뒤 나는 또 금방 돌아온 그녀의 결혼식에 하얀 레이스 속옷과 슬립을 꽁꽁 싸매 상자에 담아갔다.

그와 행복하길 바랬다. 그 만큼 고심해서 내 나름대로 예쁜 걸 골랐다. J는 긴장한 얼굴이지만 행복해 보였다.



누가 남자는 마음에 방이 여러 개고 여자는 하나랬나?똑같다. 남자도 여자도.

우리 모두 한 사람을 오롯이 사랑하다 그 사람이 떠나면 그 방은 시간따라 자연스럽게 잠기지만

어쩌다 우연한 기회에 열리기도 한다는 걸 알고 있는데...


그 방 주인은 영원히 그 사람 하나일 뿐 다른 사람이 그 방에 들어갈 순 없다. (아님 말고 ㅎㅎ)



글을 다 쓰고 나니 많지도 않은 내 모든 방문이 열린 것 같다.


"안녕? 모두 잘 지내지?"

아무렇지도 않다. 커피나 마셔야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