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엔 복화술사가 산다.

말 한 마디가 아이의 세상을 조각한다.

by 밤돌

퇴근 후, 두유를 꺼내 마시고 있었다.


"아빠! 그거 왜 먹어? 그거 당백찔 있잖아! 안돼~!"


두유를 입에 문 채, 고개를 돌렸다. 아들은 단호하게 입을 앙 다물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백찔 몸에 안 좋잖아!"


뭐라고? 아들은 진지했다. 단백질을 먹으면 안 된다니, 갑자기 웬 채식주의 선언인가 했다가 퍼뜩 기억났다. 며칠 전, 아내랑 나눈 대화.


"단백질을 가루로 섭취하면 신장에 안 좋다더라. 남은 것만 먹고, 앞으로 안 사야겠다."

"그래? 그러자."


아들은 거실에서 혼자 놀고 있었지만, 우리 대화를 다 듣고 있었던 것이었다. '단백질은 나쁘다.' 아들 머릿 속엔 그렇게 각인돼버린 듯했다.


"아, 그게 아니야. 단백질이 나쁘단 게 아니라, 이 두유처럼 단백질을 가루로 먹으면 안 좋다는거야. 이 두유는...안 먹을게."


어젯 밤에도 비슷한 일이 생겼다. 저녁을 먹고 평소처럼 간식을 권유했다.


"아이스크림 먹을래? 딸기? 사과?"

"응, 아이스크림 줘."

"그래."


갑자기 아들이 벌떡 일어났다.


"아니! 나 아이스크림, 딸기 다 안 먹을거야."

"왜?"

"건강을 위해서!"


아, 이건 또 무슨 일이람. 아내와 난 눈을 마주쳤고, 우리는 거의 동시에 조그맣게 탄성을 질렀다.


"아. 저속노화..."


순간, 며칠 전 아내와의 대화 장면이 머릿 속을 스쳤다. 최근 건강 관리에 열을 올리던 아내가 요즘 유행한다는 '저속노화' 식단을 언급하며 설탕이 든 아이스크림이나 과일에 대해 이야기 했었다. 옆에서 조용히 놀던 아들은 그 대화 조각을 주워 담고, 자신만의 건강 수칙을 머릿 속에 한 줄 써 넣은 것이 틀림없었다.


아이스크림이면 죽고 못사는 아들인데, 저런 말을 하게 될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말했다.


"그래! 그럼 우리 모두 후식은 먹지말자."

"좋아. 그럼 뭐하고 놀까?"


아들은 웃으며 놀이를 재촉했다.


최근 들어, 우리 말을 조용히 귀담아 듣는 아들을 자주 발견한다. 아내와 대화를 하다가 문득 주위가 이상하게 조용한 때가 있다. 고개를 슬쩍 돌려보면, 아들이 레고를 가지고 놀거나 책을 보다가 눈동자만 살짝 돌려서 우리를 쳐다보고 있다. 우리 말을 하나도 빠짐 없이 듣고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 대화는 배경음이 아니었다. 우리가 무심코 한 말도 기억 속에 집어넣고 있었고, 그걸 해석하고 조합하여 스스로 말로 내뱉기까지 했다. 우리가 무심코 흘린 말 한 마디가 아이의 가치관으로 굳어질 수도 있다는 책임감이 느껴졌다. 한편으로 내가 실수한 것이 있을까 싶어서 등골이 서늘했다.


"이제 우리 말 다 듣더라!"

"맞아, 진짜 말 조심해야겠어."

"말을 더 흘려야겠어. 내 믈 드를 수 읏긋어?"

"응, 내 믈은?"

"윽케이."


아내와 난 장난삼아 복화술로 대화를 연습했다. 물론 가장 중요한 건, 아이 앞에서 말을 가려 하는 것. 하지만 말이 꼭 필요할 때도 있으니까...


어쩌면 이런 우스꽝스러운 순간들도, 부모라서 겪을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일지도 모른다. 부모가 된다는 건 그런 것 같다. 아이와 함께 하며, 내가 던지는 말의 무게를 비로소 깨닫는 일. 아이가 자라고, 나도 조금씩 더 나은 어른이 되어간다.


그리고 어느새, 복화술의 달인이 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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