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창 너머, 너라는 우주
요즘 외동이 참 많다. 나도 외동아들을 키우고 있다. 아이가 하나니까, 그 아이에게 쏟는 관심과 에너지도 어쩔 수 없이 많아진다. 밥을 먹을 때도, 잠을 잘 때도, 심지어 혼자 놀고 있어도 늘 아들을 보고 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왜 그렇게 했지?'
'방금 그건 무슨 뜻이지?'
어느 날 밤, 아들과 있었던 일을 되새기며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건 육아가 아니다. 좀 지나치다. 우연히 생겨난 변이를 앞에 두고, 수십 명의 과학자가 티끌 하나 없는 유리창 너머로 실험체를 들여다보는 영화 장면이 떠올랐다.
아이의 표정, 기분, 말투, 놀이방식까지 분석하고 원인과 결과를 정리하며 더 나은 실험 조건을 위해 환경을 조정한다. 심지어 이 연구실엔 나만 있는 게 아니다. 수석 연구원은 따로 있다. 바로 사랑하는 아내. 우리는 같은 실험 대상을 두고, 때로는 전혀 다른 가설을 세운다.
“그렇게 반응하면 아이가 더 예민해져.”
“아니, 지금 이건 분명히 선을 넘은 거야.”
책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고, 각자의 육아전문가 박사님을 들먹이는 건 일상이다. 그러다가 말다툼으로 끝나기도 하고, 어떤 날은 인턴 연구원으로 오신 부모님들께 지나치게 엄격해지기도 한다. 아들과도 늘 순조로운 건 아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실험 조건을 바꾸고 이래라저래라 한다. 우리 말투가 조금만 딱딱해져도 아들은 표정이 금세 변한다.
그걸 본 아내가 말없이 나를 쳐다보는 순간, 우린 그날 실험에 실패했다는 걸 직감한다. 모든 성공과 실패가 오롯이 이 아이 하나에게 남는다는 부담. 그 무게는 생각보다 훨씬 무겁다. 한 아이만 키우는 부모는 때때로 실수할 여유도 부족하다. 어쩌면 모든 부모가 그럴지도 모른다. 사랑이 클수록, 실수는 더 조심스러워지고,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으려 애쓴다.
그래서 가끔, 연구원은 조용히 사라진다. 절대 연구하기 싫어서가 아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다. 침대에 누워서 아직 안 깬 척하기도 하고, 화장실에 핸드폰을 들고 들어가 아주 오래 앉아 있기도 한다.
“아빠 뭐 해?”
“어... 배가 좀 아프네.”
아, 우리 집엔 나와 아내 말고 과학자가 한 명 더 있다. 아들도 형제가 없는 덕에 아빠를 한 번 더 쳐다볼 여유가 있다.
“게임하고 있잖아.”
"...... 정확한 분석이야.”
아내도 아들도 아빠의 노력을 안다. 그래서 서툴고 부족한 아빠를 내버려 둘 때를 안다. 눈 뜨고 자고 있어도, 화장실에서 아무 소리가 안 들려도 그냥 모른척해준다. 잠깐이지만, 두 사람의 배려 덕분에 도망친 마음이 조심스레 돌아온다.
다시 아이 곁에 앉는다. 스트레칭을 한 번 하고 조금 더 멀리서 바라보고, 조금 더 가볍게 웃어본다. 이건 연구가 아니라,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아빠의 연습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오늘도 실험 중이다. 너를 덜 걱정하고, 더 사랑하는 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