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돌콩 Jan 12. 2024

12월의 소리.

살아남은 자의 회고.


정년퇴직을 하고, 회사에 계약직으로 재입사한 팀장님이 12월 31일 자로 그만두게 되었다. 본인의 의지로 그만두는 게 아닌, 통보의 수준이었다고 전해 들었다. 조금은 화가 난 표정으로, 며칠 동안 그래도 유정의 미를 거두겠다며 맡은 일을 다하겠다던 그는 마지막 출근날 책상을 정리하며 나에게 자신이 사용하던 키보드를 선물해 주었다. 


분홍색과 흰색이 어우러진 키보드는 묵직했지만, 타닥타닥 타자 소리가 아주 경쾌한 녀석이었다. 플라스틱 뚜껑까지 덤으로 있는 그 키보드를 넘겨주는데, 이걸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순간 멈칫하게 되는 것이었다.  


좋은 일로 퇴직을 하는 거라면 넙죽 받겠는데, 어찌 보면 명예롭지 못하게 떠나는 분께, 선물을 받는다는 게 좀 민망했다. 그래도 서운함 없도록 감사한 마음으로 키보드를 받았다. 그러자 그는 연필꽂이, 보드 자석, 핸드크림, 심지어 사용하던 클린 스프레이까지 나에게 '기증'하였다. 


물건들을 정리하다가 '열심히 하니까~' 하며 하나 둘 나에게 넘기는 그의 목소리에서 착잡한 마음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자리를 정리하는 동안,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내 할 일을 해나가야 한다는 건 참 낯선 경험이었다.



회사는 무슨 기준으로 직원을 '솎아'낼까?


솎아낸다는 표현이, 오버스러울까? 잠시 생각해 봤다. 

입사 3개월 차인 나의 관점에서 볼 때, 나이를 막론하고 그는 사무실에서 가장 열정적으로 일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 사람이었다. 자신보다 젊고 어린 직원들이 수두룩 했지만, 힘쓰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새로운 기술들도 계속 배우고 익히는 사람. 한 가지 문제라면 자신보다 어린 상사와의 트러블이었다. 그것이 그의 퇴사에 가장 큰 이유였을까? 회사에 대한 불만이 많거나, 혹은 비전이 맞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한 가지 이유로 회사가 열심히 일하는 직원을 내치진 않았을 것이다. 눈앞에 보이는 성과만으로 자리를 확고히 할 수 있는 곳이 회사가 아님을 깨달은 시간들이었다. 


전 팀장이었던 그가 잘려 나가고, 계약직 사원 몇 명이 퇴사를 했다.


그렇게 누군가는 잘려나가고, 임원들은 끊임없이 면접을 보았으며 사무실에는 새로운 누군가가 채워졌다. 흉흉한 분위기와 뉴페이스를 환영하는 분위기가 믹스되어 난생처음 겪는 희한한 분위기 속에서 연말이 지났다.  


그 솎음 작업에서 살아남은 나는, 내쳐진이가 남기고 간 키보드를 열심히 두드리며 분위기에 적응하려 노력 중이다.


타닥타닥. 


경쾌하던 녀석의 소리는 때론 달리는 말발굽 소리가 된다. 사무실의 적막을 깨고 '나 열심히 일하는 중이야' 표시를 내는 데 아주 최적화되어있는 녀석. 때론 그 소리가 부담으로 다가올 때도 있다. 


타닥타닥, 구글구글, 샥샥샥 


저마다의 키보드 소리가 화음을 이루며 연말의 흉흉함을 몰아내고 있다. 연초 사무실은 그렇게 파이팅과, 안도와, 씁쓸함이 어우러진 BGM으로 가득 차있다. 


마흔다섯. 난생처음 겪는 일들의 연속이지만, 놀란 티 내지 말아야지. 


다시 경력을 써 내려간 지 4개월 차. 

나의 슬기로운 직장생활을 응원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브런치의 필기체가 나를 살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