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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콩 Oct 24. 2022

공짜로 줘도 못 가져가나?

마흔 넷_젊음에 소심 해지는 나이.

 지난 어린이날의 일이다. 아들은 매년 어린이날마다 좋아하는 만화영화 <카봇>에 나오는 로봇 장난감을 선물로 원하곤 했다. 그런데 6학년이 된 올해는 웬일로 장난감 사달라는 얘길 안 하는 것이었다. '녀석, 저도 이제 컸다고... ' 아들이 대견해 미소가 씨익 지어졌다. 그래도 마지막 어린이날인데, 그냥 지나치기 서운했다. 애초부터 어린이날은 초등학생 때까지만이라고 못 박아 두었기 때문에 올해가 아들에겐 어린이날 선물을 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왜~ 말해봐~ 어때~"

 "갖고 싶은 장난감이 마트에 있긴 한데...... "

 "뭔데? 오늘 장 보러 가는 길에 사 줄게."

 "아니... 아니야. 괜찮아. "

 "진짜? 네가 괜찮다고 했다~ 어린이날 선물 안 사줘도 되는 거지?"

 "아니 갖고 싶긴 한데... 마트 가서 못 고르겠어."

 "왜?"

 "동생들이나 가지고 노는 건데...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뭐....., 동생 선물 사러 왔나 보다~ 하겠지.... "

 "그러니까... 창피해.."


 자기 또래의 고학년 친구들 중 로봇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친구가 더 이상 없을 것 같고, 마트 장난감 코너에 가도 꼬꼬마 동생들 뿐이니, 그 틈에서 장난감 고르는 자신을 생각해보니 창피할 것 같았나보다. 


 어차피 하루 이틀 가지고 놀 면 구석에 던져져 먼지만 쌓이고 있을 건데, 몇 만 원씩 들여 선물을 사 줄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을 매번 했었는데, 장난감을 안 사겠다는 아들의 말이 참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제 나이 수준에 맞추느라 좋아하는 것이 있어도 맘껏 말할 수 없는 아들이 짠하기도 했다. 

 그런데,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재주가 있는 남편이 아들에게 말했다. 


 "로봇 장난감 좋아하는 어른들도 많아~ 창피할 게 뭐 있어~ 가서 사는 게 창피하면 인터넷으로 사는 방법도 있지~ 원하는 걸 말해봐~ 아빠가 사 줄게~ 오늘 내로 도착은 못 하겠지만... 마트서 사는 것보다 오히려 더 저렴해~"


 "오히려 더 저렴해?"


 아들의 눈이 반짝했다. 두 남자는 쑥덕쑥덕 하더니 순식간에 로봇 장난감 결재를 끝냈다. 아까비... 돈 안 쓰고 지나갈 수 있었는데... 

 문제는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갑자기 기분이 업 된 아들은, 장난감 배송이 어린이날 되는 것이 아니므로, 정작 어린이날에 아무 선물도 못 받으면 너무 슬플 거 같다고,  어디라도 놀러 가자 졸랐다. 


 "강원도 갈까? 엄마 남해는 어때?" 하는 아들에게 <여의도 한강공원 나들이 + 오락 1시간>을 제안하며 딜에 성공했다. 



 오랜만에 찾은 여의도 한강공원은 코시국 요량하곤 사람이 제법 붐볐다. 다리 아래 계단에 자리를 잡고 작은 돗자리 하나를 펼쳤다. 얼마 전 마트에서 탄산음료를 한 박스 사고 덤으로 받은 미니 테이블을 펼치니 찰떡이었다. 근처 편의점에서 아들은 젤리를, 나는 옥수수과자를 한 봉, 거기다 각자가 좋아하는 음료수를 하나씩 사들고 와 돗자리 위에 앉았다. 


 나는 과자를 먹으며 미리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을 읽었다. 사실 빌려 놓고 읽히지 않아 반납 기간만 채워가던 책인데, 환경이 달라져 그런지 술술 읽혔다. 그 옆에서 아들은 젤리 먹는 것도 잊은 채 모처럼 엄마 눈치 볼 일 없는 오락 시간을 즐겼다. 남편은? 돗자리에 모로 누워 낮잠 잘 준비를 했다. 언제 어디서든 눕기만 하면 잠이 드는, 귀한 축복을 가진 남편은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코를 골았다. 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이었다. 이것은 어린이날을 가장한 어른의 날이라 해도 되겠다며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즈음. 계단 아래 너른 광장에 젊은 여성 두 명이 박스 수십 개를 가져와 나르더니 큰 돗자리를 펼치고 거기에 박스를 뜯어 내용물을 쏟기 시작했다. 죄다 옷이었다. 구제 옷을 팔려나보다 생각될 즈음, 커트 머리를 한 여자 한 명이 계단 쪽을 올라오며 돗자리마다 가서 뭐라고 이야길 하는 것이었다. 


 "저기 구제 옷 무료 나눔이에요. 와서 맘에 드는 거 가져가세요"


 무료라? 귀가 솔깃했다. 공짜라면 눈이 번쩍 떠지는 아줌마라서 그런가. 여하튼. 소심한 나는 주변을 슬렁슬렁 살피며 엉덩이를 떼어 보았다. 여자의 목소리에 잠에서 깬 남편도 바로 앉으며 정신을 차리려 눈을 깜박거렸다.


 "무료 나눔 한데, 같이 가서 골라보자~"

 "아 그런 거 딱 싫어~ 혼자 가~"

 "아 왜~ 혼자 가기 뻘쭘해~ 같이 가자~"

 "됐어~"


 연애 시절엔 분리불안이라도 있는 사람 마냥 내 옆에 찰싹 붙어있던 남편은, 나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며 '너나 가라 하와이~'에 버금가는 말투로 구제 옷 쇼핑은 너나 가라고 했다. 정이 뚝 떨어지게 내리꽂는 그 말투에 순간 화가 치밀어, 그따위로 밖에 말을 못 하는 거냐고 쏘아붙이려다가 '아차차 여긴 야외지' 정신이 번뜩 들었다. 릴랙스 하고, 구제 옷 무더기가 있는 곳으로 혼자 가 보기로 했다. 


 화려한 색상의 구제 옷들이, 이게 다 어디서 난 것이냐 싶을 만큼 많은 종류의 옷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체크무늬 긴치마도 예뻐 보이고, 연두색에 금장 단추가 달린 숏 재킷도 참 예뻤다.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선뜻 집어 들 수가 없었다. 

 첫째는 이게 진짜 다 무료일까? 골라도 정말 괜찮나? 하는 소심한 생각에서 선뜻 고르지 못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내 몸이었다. 출산 후 15킬로 가까이 살이 찐 내 몸은 박스티에 적응 중이라 사이즈를 정확히 알지 못한 상태였다. 출산 전엔 55 사이즈도 컸던 여리 여리한 몸이었는데... 지금은 아마도 66? 허리 사이즈는 짐작도 되지 않았다. 새삼 내가 내 몸에 참 관심 없이 십여 년을 살았구나 싶었다. 


 옷 주변을 몇 바퀴를 돌며 눈으로만 구경을 하고 있을 때 한 젊은 커플이 지나가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자기야 이거 무료인가 봐~ 한번 볼까?"

 "응~그래 내가 같이 골라 줄게"

 "어, 이거 어때?"

 "어 그거 색깔이 잘 어울린다. 한번 걸쳐 봐, 가방 나한테 줘~"

 "어때?"

 "어, 완전 딱 자기 거다. 겟겟~,  저기 저 치마 어때? "

 "어디 이거?"

 "어, 그거 완전 잘 입을 것 같은데? "


 둘은 오자마자 여자에게 어울릴법한 옷을 휙휙 골라 집어 들었다. 남자가 더 열심히 골라주고, 입어보라며 여자의 가방을 들어주기도 했다.  

 '치..좋을 때다. '  순간. 너나가라하와이~ 했던 남편에게 눈이 갔다. 들리지도 않을 거리였지만, 잠깐만 와 보라고 손짓을 했다. 이쪽을 보는 듯했지만 남편은 아무 반응도 없었다. 


 '흥. 진짜 너무 하네'


 나는 즐거운 데이트의 연장에서 구제 옷을 고르고 있는 커플을 보며, 나 자신이 작아지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 청춘이 부러웠다. 분명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을 거다.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골라주고, 같이 쇼핑을 하고, 작은 일 하나에도 같이 하며 즐거웠던 스무살이, 서른 살이... 


 그들 옆에서 좀 괜찮아 보이는 옷을 집어 드는데도 용기가 필요했다. 힘들게 집어 허리에 대어 본 치마는 잠기지도 않을 것 같아 다시 내려놓았고, 재킷은 색감이 참 맘에 들었지만 역시나 내 몸에 맞을지 아리송했다. 커플처럼 누군가 서로 봐 주는 사람이 있다면 살짝 걸쳐보기도 하겠는데, 혼자 입어보고 꽉 끼니면 무슨 망신일까 싶어 선뜻 입어 볼 수가 없었다.  사실, 무료 나눔에도 불구하고,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저마다 자기들의 돗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거나 사진을 찍거나 하며 이쪽엔 관심도 없는데 괜히 나만 주변을 신경쓰고 있었던 거였다.  

 커플은 순식간에 서 너 점의 옷을 골라 '득템!'이라고 수군덕대며 사라졌다. 


 남편에게 카톡을 보냈다. '소심해서 옷을 못 고르고 있으니 와서 좀 도와달라'라고. 

 남편의 반응은? '못 고르겠으면 그냥 와. 나는 가지 않을 거야' .

 거기서 여기가 몇 걸음이나 된다고 그게 귀찮아서 안 오나 서운했다. 그래도 무료 나눔인데, 그냥 가기에는 아쉬웠다. 예쁜 옷들도 많이 보였고. 

 나는 계속해서 옷 더미 주변을 빙빙 돌면서 '음 저것도 이쁘다' '오 저건 겨울에 반 코트랑 입으면 이쁘겠다' 생각하며 아이쇼핑만 했다. 


 "이걸 다 어디서 가져온 거예요?"


 커트머리의 여자는, 본인이 구제 옷에 관심이 많아 사모은 것인데, 이사를 가게 되어 나눔 하려고 가져온 것이라고 했다. 이 많은 옷들을 그저 나눔 하려 하다니 젊은이가 참 여유가 있나 보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심 끝에 나는 용기를 내어 처음 본 연두색 재킷 하나를 집어 들었다. 몸에 살짝 대어 보았는데 길이가 짧다. 아줌마가 된 이후 엉덩이가 덮이지 않는 상의를 입어본 적이 없었다. 색깔도 꼭 어둠의 자식인 것처럼 블랙 혹은 네이비, 그레이 중 하나였다. 하지만 마음속에서 그동안 시도해 보지 못한 연두색에 대한 갈망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한번 숏 재킷에 도전해보자 하는 생각과 가져가서 입지 못할 거라면 더 잘 입을 수 있는 젊은이를 위해 놔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충돌하면서 망설여졌다. 무엇보다 재킷이 내 몸뚱이에 맞을지 의문이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순간 교차하며 들고 있던 재킷을 살짝 내려놓는 그때.


 "그거 안 하실 거예요?"


 옷을 고르던 또 다른 커플의 여자가 물었다. 

 여자 옆에 서 있는 남자의 손에는 내가 처음부터 괜찮다고 생각했던 초록색 체크무늬 치마와, 고동색 울 재킷이 들려있었다. 짧은 시간에 괜찮은 걸 쏙쏙 잘도 골랐구나 싶었다. 


"네, 안 맞을 것 같네요..."


 그러자 여자의 남자는 냉큼 그 연두색 재킷을 집어 들며 '대박'이라고 읊조렸다. 남자는 여자를 거울 앞으로 데리고 가 재킷을 걸쳐 주었다. 거울 앞에서 재킷을 걸치고 요리 조리 따져보던 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낙찰'의 뜻으로 고갤 끄덕였고, 남자는 지금껏 고른 옷들을 야무지게 접었다. 그리곤 커트머리 여자가 나눠 준 검정 봉지에 모두 담고, 여자와 손을 잡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아, 거울이 있었구나...' 


 그제야 나는 몇 바퀴 옷 무더기 주변을 맴돌면서도, 내가 고갤 한번 들어보지 못했단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뭐랄까. 이런 문화가 익숙지 않아서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젊음의 기에 눌렸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갖고 싶은 로봇 장난감을, 제 나이에 맞지 않는 것일까 봐, 사람들이 수군댈까 봐, 고르지 못한 아들처럼, 

젊은이들의 틈에서 구제 옷을 고르는 내 모습이 어울리지 않을까 봐, 이방인 같을까 봐 지레 소심해졌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요즘 유독 젊은이들 틈에서 이질감을 느꼈던 것 같다. 누구 하나 나보고 뭐라는 사람이 없는데도 젊은이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자꾸 소심해졌다. 늙은 내 피부가, 살찐 내 몸이 괜히 도드라지듯 느껴졌고.


 나도 다 가져봤던 젊음이다. 60대에겐 40대인 나도 젊은이이다. 

 그런데 나는 왜! 젊은이들 앞에서 작아지는 것일까. 아니 왜 공짜로 줘도 못 고르고 가져오질 못하느냔 말이다. 


 한참을 구경하고도 빈손으로 돌아온 날 보며 남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반응이었다. 


 "어쩜 그리 선택을 못하냐"

 "이건 내 우유부단한 성격 때문이 아니야. 몸에 옷이 맞을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골라... "

 "젊은이들은 금방 쑥쑥 골라 가더만"

 "커플들은 남자들이 옷 다 골라주더라. 그걸 보면서도 너는 엉덩이 무겁게 앉아 있었냐?"

 "야, 우린 그럴 나이가 아니지 않아?"

 "치.. 뭐 그런 나이가 어딨냐? 하긴, 저 애들은 아무거나 입어도 다 맞는 나이잖아. 나도 저 나이 때는 아무 옷이나 입어도 쑥쑥 잘 들었갔는데... 나도 저런 젊은이였음 한 봉지 주워왔다아~"


 그런 얘길 나누는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도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 몸에 갱년기가 온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젊음에 소심해지고, 눈물까지 날 일일까. 


<젊음이 이쁜 나이> 그 말을 정작 젊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나이 마흔을 넘고 보니, 젊은이들이 잘생기거나 꾸미지 않아도  풋풋한 젊음, 그 하나로 다 예뻐 보인다는 것을 이해한다. 금방 지나가버린 듯한 내 예뻤던 젊은 날이 사뭇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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