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받이

되, 물림

by 밤얼음

"씨받이라니요."


그 말은, 이 집에서 죄였다.


정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례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찻잔이 테이블 위에 내려앉았다. 바닥에 천을 덧댄 듯, 천천히.


거실 한쪽 TV에서 저녁 뉴스 소리가 갑례의 목소리에 묻혔다.


"애도 못 낳는 주제에, 뭐 잘났다고 입을 놀려?"


정자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밭이 그 모양인데, 좋은 밭 찾는 거야 당연하지."


갑례의 목소리는 단정했다.


"내일 오기로 했다."


이미 내려진 결론이었다.

정자의 손등에 힘줄이 솟았다.


"작은 방. 이부자리까지 싹 정리하거라."


갑례는 잠시 말을 멈췄다.

정자를 보지 않은 채, 봉투 하나를 밀어 놓았다.


부적.

여러 장이었다. 종이 끝이 눅눅하게 손에 달라붙었다.


"침대 밑에랑 베갯속에 넣으렴."


그 말로 끝이었다.

찻잔이 다시 들렸다. 이번에도 소리는 없었다.


비어 있던 작은 방 문을 열자 공기가 먼저 밀려 나왔다.

오래 닫혀 있던 방 냄새였다.

창문을 열었다. 보랏빛 커튼이 바람에 펄럭였다.


침대 위 이불을 걷어냈다.

하얀 새 커버를 씌웠다.

남편과, 아직 얼굴도 모르는 여자를 위해.


이불을 정리하던 손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그날 저녁, 정자는 평소처럼 남편의 겉옷을 받아 들었다.

무룡은 넥타이를 풀며 아내의 얼굴을 살폈다.


"당신, 걱정할 거 없어."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시대가 변하고 있잖아. 씨받이는 무슨 씨받이야. 어머니한테는 내가 다시 말할게."


무룡은 정자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그제야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셔츠 한쪽이 젖어들었다.


"바보같이.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잠자리까지 다 만들어 놨어?"


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룡은 정자의 얼굴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거기서 자자."

"네?"

"그 방에서 내가, 당신 아닌 사람이랑 같이 있을 일은 없어.

절대."


무룡의 셔츠 단추 하나가 어긋나 있었다.


정자는 그것을 고쳐주지 않았다.


해가 뜨기 전, 오늘도 주방 불이 먼저 켜졌다.

정자는 앞치마를 맸다.


"몰상식한 것."


갑례의 목소리였다.


"우리 집안 대를 끊어놓으려고 작정을 했구나."


정자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한 번만 더 그 방에 얼씬거렸다간 이 집에서 쫓겨날 줄 알 거라."


갑례의 시선이 정자를 찍어 눌렀다.


"애도 못 낳는 네가 그 방이 어디라고 감히 들어가."

"어머니."


무룡의 목소리가 갑례와 정자 사이를 파고들었다.


"왜 자꾸 이러세요. 이제 제발 그만 좀 하세요."


갑례의 눈이 무룡을 훑었다.

곧 정자에게 옮겨졌다가, 다시 무룡에게 돌아왔다.


"모지란 놈. 내가 좋은 밭 구해줬으면, 꽃 심을 생각이나 해, 이것아."


식탁 위에 작은 수첩이 내려앉았다.


"그 아이 먹일 것들이다."


정자는 그것을 펼쳤다.

장어탕. 닭백숙. 흑염소탕. 사골국.

고기였다. 몸을 만들기 위한 음식들.

정자는 손에 쥔 채 입술만 깨물었다.


"건강한 애 들어서려면 잘 맥여야 한다."

"어머니!"


무룡의 목소리가 부엌을 가로질렀다.


그때였다.

초인종이 울렸다.

정자는 숨을 삼켰다.

어떤 얼굴이, 이 집 안으로 들어오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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