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 물림
창가에 걸린 천기저귀가 바람에 흔들리며 자꾸만 눈에 밟혔다.
한동안 이어진 미역국 앞에서 금화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형님, 이것도 그냥 치워줘요."
정자가 금화의 그릇을 물에 담갔다.
그때, 안쪽에서 갑례의 목소리가 울렸다.
"들어들 와라."
갑례는 방에서 아이를 안은 채 웃고 있었다. 아이의 작은 입이 꿈틀거렸다.
"이제 정리할 때가 됐구나."
잠시 후, 갑례가 고개를 들었다. 테이블 위에 두툼한 돈봉투와 누렇게 바랜 서류봉투가 놓여 있었다. 금화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오늘 이 집에서 나가렴."
갑례는 아이를 내밀었다.
금화의 손이 아닌, 정자의 손에.
"눈이 껌뻑껌뻑하네. 애 재우기 전에 금화 짐부터 싸주렴."
정자의 품에 아이가 안겼다.
금화의 웃음기가 빠졌다.
"...어머니, 제 아이를 왜."
"누가 네 아이니."
차분하던 목소리가 날카롭게 꺾였다.
갑례는 봉투를 집어 금화 앞으로 밀었다.
"잊었나 보구나. 네가 이 집에 왜 들어왔는지."
금화의 손이 치맛단을 쥐었다.
"넌 씨 받으러 왔고, 우린 그 씨 잘 줬고, 대는 이미 이어졌고. 그럼 네 몫은 끝났지."
"그럼... 그동안 왜... 왜 저를 며느리처럼..."
"귀한 씨 가졌는데 희망쯤이야 얼마든지 줄 수 있지. 네 마음이 편해야, 내 손자도 편한 거니."
갑례는 서류 봉투를 던졌다.
"네 손으로 쓴 계약서다.
씨받이.
그게 네 이름이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피가 식었다.
거실에서 정자가 포대기에 아이를 업은 채 짐을 들고 현관을 나섰다.
대문 앞에 짐가방이 내려졌다.
"이번엔, 진짜 내가 싼 네 짐이야.
무룡 씨 오기 전에 가. 너한테도 그게 나을 거야."
"난 안 가요. 한 발짝도."
정자와 금화 사이에 차 불빛이 닿았다.
무룡의 차였다. 차문이 열리고 그가 내렸다.
금화와 짐, 정자의 등에 업힌 아이를 바라봤다.
금화의 눈은 아직 빛을 잃지 않았다.
"무룡 씨... 어머님이 저 내쫓으셨어요. 저 좀 데리고 들어가 줘요."
무룡은 잠시 서 있었다.
낯설었다.
처음 이 집에 들어오던 날처럼.
금화가 그의 팔을 붙들었다.
"무룡 씨...?"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지나, 정자에게로 흘렀다.
무룡의 시선이 금화 위에 머물렀다.
그리고 천천히, 금화의 손을 풀어냈다.
"이미 어머니랑 끝난 얘기야.
...잘 살아."
금화의 다리가 풀렸다.
주저앉은 채 무룡의 다리에 매달렸다.
"갑자기 왜 이래요, 무룡 씨...
약속했잖아요.
저 버리지 않는다면서요...
제발요, 저 버리지 마요..."
울음이 터졌다.
그와 동시에 아이도 울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무룡은 금화의 팔을 뿌리쳤다.
그는 정자에게로 가, 아이를 안아 들었다.
돌아선 뒷모습이 잠시 멈췄다.
그 순간, 금화의 몸이 반사처럼 앞으로 쏠렸다.
끝내 무룡은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닫혔지만 아이의 울음은 멈추지 않았다.
제 어미를 찾는 것처럼.
금화는 뒤돌아 정자에게 기어갔다.
무릎이 눈에 파묻혔다.
치맛자락으로 바닥을 쓸며 정자의 발을 붙잡았다.
"형님, 그동안 제가 잘못했어요... 저 한 번만 데리고 들어가 주세요...!"
정자는 말없이 내려다봤다.
"항상 저 품어주셨잖아요... 형님 그런 사람이잖아요."
"난 왜 늘 그런 사람이어야 하지."
금화의 숨이 목에 걸렸다.
"그럼 아이... 제 아이 얼굴 한 번만..."
쌓인 눈 위에 떨어진 눈물이 깊게 패였다.
"내 아이야."
그 자국을 덮듯 정자의 말이 떨어졌다.
금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신이 뭔데!
당신이 낳은 것도 아니잖아!
내가 낳은 내 아이야!"
소리가 골목을 밀어냈다.
끝까지 닿았다가, 부서졌다.
흩어지고 나서야 정자가 입을 열었다.
"어머님이 늘 그러셨어.
밭이 그 모양이니, 좋은 밭 찾는 거라고.
근데... 거기서도 꽃은 피더라.
잘 키울게. 내 아들로."
골목 끝 가로등 불빛이 한 번 흔들렸다.
"내 아들이 당신이 친모가 아닌 걸 모를 것 같아!"
바람이 잠깐 멎은 듯 조용해졌다.
정자의 입가에 얇은 선이 걸렸다.
"거짓도 믿으면... 진실이 되는 거니까."
그 말이, 되돌아왔다.
눈에서 빛이 빠져나갔다.
팔이 힘없이 흘러내렸다.
대문이 닫혔다.
자갈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처음 이 집에 들어오던 날처럼.
금화는 한참을 닫힌 대문 앞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결국엔...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금화의 말 위로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지워내듯 흔적을 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