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 물림
삼십 년이 흘렀다.
계절만 몇 번이나 바뀌었을 뿐, 집은 그대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되돌려 받지 않아도 될 것까지, 세상은 다시 안겨주곤 했다.
한 청년이 품에 가득 꽃다발을 안은 채 대문을 열었다.
봄바람이 마당에 감돌았다. 자갈 대신 풀과 흙이 자리를 채웠고, 한쪽에는 작은 텃밭이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상추와 고추, 토마토가 줄을 맞췄다.
"엄마!"
목소리가 집 안을 환하게 밝혔다.
부엌 쪽에서 물소리가 멎고, 느릿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정자가 앞치마를 벗으며 나왔다.
미역국 냄새가 따라붙었다.
"우리 아들 왔네."
검은 머리에 흰 눈이 수 놓인 만큼 눈가의 주름도 깊었다.
울음 대신 웃음이 피어 있었다.
아들 손에 들린 꽃다발이 정자의 품에 안겼다.
오래전, 그 품에 안겼던 아이처럼.
"네 생일인데... 매년 엄마가 꽃을 받네."
"엄마가 저 낳아준 날이잖아요."
그 말이 정자의 가슴이 저리게 했다.
아이는 정자를 엄마로 알고 자랐다.
금화라는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채로.
"아버지 아직 안 들어오셨어요?"
"조금 늦으시려나보다."
"요즘 더 바쁘시네... 낮에는 텃밭 나가시고, 저녁엔 산책을 왜 그렇게 오래 하시는지."
"퇴직하시고 취미라도 생기셔서 다행이지."
식탁 위에 생일상이 차려져 있었다.
김이 오르는 미역국, 갈비찜과 불고기, 잡채와 나물 몇 가지. 그리고 케이크.
그때였다.
현관문이 열리며 무룡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성이 일찍 왔네?"
"아버지, 혼자만 다니지 마시고 엄마랑 같이 좀 다니세요."
무룡이 의자를 빼고 앉았다.
"당신 들었지? 인성이는 나보다 당신 편이야."
"엄마 배에서 나왔는데 당연히 엄마 편이죠."
인성의 장난 섞인 말에 정자와 무룡이 함께 웃었다.
정자는 갑례의 방문 앞에 섰다.
"어머님, 인성이 왔어요."
기척이 없었다.
열린 문 너머,
침대 대신 두툼한 요 위에 갑례가 누워 있었다.
"누가 왔다고?"
"인성이요."
"인성이가 누구냐."
뒤에서 인성이 다가왔다. 곁에 앉아 갑례의 손을 잡았다.
"할머니, 오늘 제 생일이에요."
갑례가 그 손을 꽉 잡았다.
"아이고... 인성이구나.
애미는 밥 안 차리고 뭐 하고 섰어!"
"할머니, 엄마가 다 차려놨어요. 같이 드셔요."
네 사람이 식탁에 모였다.
오래전, 금화가 앉았던 자리에 이제는 그녀의 아들이 앉았다.
인성이 숨을 불었다.
촛불이 힘없이 흔들리다 꺼졌다.
"누가 우리 손자 생일상을 만져!"
갑례의 목소리가 식탁 위를 갈랐다.
날카롭던 얼굴은 곧 흐려졌고, 화를 냈던 방금의 기억조차 잊은 듯 눈빛이 멍해졌다.
익숙한 듯 갑례의 상은 방으로 옮겨졌다.
방 안에서 거친 소리가 몇 번 울렸다.
한참 뒤, 정자는 빈 상을 들고 다시 방에서 나왔다.
무룡이 정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치매에 좋다는 거 다 해봐도 소용없네...
그래도 당신이 있어서 다행이야.
나도, 인성이도."
손은 따뜻하지만 속은 비어 보였다.
두 사람의 겉과 속처럼.
"저 약국 좀 다시 다녀올게요."
"퇴근한 거 아니었니?"
"저녁마다 오시는 어르신이 있는데, 오늘 일찍 닫아서 신경이 좀 쓰여요."
인성은 집을 나섰다.
골목이 바뀌었다.
가로등을 뚫고 번지는 노래방 불빛.
그 빛과 겹쳐진 간판들.
술에 취한 웃음소리가 밤을 채웠다.
약국 문을 열려던 순간,
담배 냄새가 스쳤다.
인성은 고개를 돌렸다.
골목 안쪽.
조금 어려 보이는 여자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달라붙는 원피스.
흐트러진 마스카라.
찢어진 입술 끝에 번진 립스틱.
헝클어진 머리.
그에 비해 이상하리만큼 침착한 손.
라이터 불꽃이 바람에 꺼졌다.
다시 엄지를 굴리는 순간, 인성과 눈이 마주쳤다.
잠깐.
아주 짧은 침묵.
여자의 손끝에서 불이 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