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 진실

되, 물림

by 밤얼음

"왔구나."


갑례의 눈꺼풀이 느리게 들렸다.

아무도 없는 문이었지만, 그녀의 시선은 분명 그곳에 머물러 있었다.


번진 시야 끝에서, 닫혀 있어야 할 방문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지나버린 새벽.

방 안은 잠들어 있었다.

밤새 내리던 비는 그쳤고, 문을 두드리던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갑례는 평소처럼 누워 있었다.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모습으로.

무소식은 끝내 희소식이 되지 못했다.


향 냄새가 집 안에 엷게 퍼졌다.

갑례의 방은 말끔했다.

정자의 손끝에서 이불이 반듯하게 접혔다.


툭.


굵은 소금 한 알이 바닥으로 굴렀다.

정자의 시선이 멈췄다.

문득, 낡은 기억 하나가 스쳤다.


"...쯧. 아들이 없으니 저리 되는 거지."


오래 전의 비웃음은 결국, 자신의 결말이 되었다.


평생 바라던 것들. 평생 붙잡고 있던 이름들. 이어졌다고 믿었던 시간들.


사라진 자리에는 남겨진 것들만 있었다.

비밀.

진실.


정자는 서랍을 열었다.

낡은 서류봉투가 손에 잡혔다.

오래전, 씨받이 계약서.

번진 잉크 위에서도 금화의 서명은 선명했다.


겹쳐 있던 사진 한 장.

그 속에서 웃고 있는 금화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무룡이 방 앞을 지나치다 멈춰 섰다.

정자의 손에 들린 것들을 확인한 순간, 황급히 안으로 들어와 방문을 닫았다.


"그건 뭐 하러 보고 있어. 이젠 갖다 버려야지."


정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리 내."


무룡이 팔을 뻗었다. 정자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알려야 할 때가 된 것 같아요."


무룡의 숨이 날 선 소리로 흘렀다.


"당신 미쳤어? 어머니 돌아가시자마자 무슨 헛소리야."


"돌아가셨으니까요."


정자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다.


"...어머님께서 돌아가셨으니까. 이제 꺼내야죠. 묻어뒀던 비밀."


창밖에서 바람을 스치며 창틀에 잔잔한 떨림을 남겼다.

무룡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묻어둔 건 그대로 두면, 부스러져 없어지게 돼 있어."


이번만큼은 정자의 눈이 무룡을 피하지 않았다.


"아니요."


잠시 숨이 고였다.


"묻힌 건 결국 파헤쳐지게 돼 있어요."


"진실이 인성이를 더 망가뜨릴지도 몰라."


무룡의 말은 정자에게 닿지 않았다.

그녀는 서류로 시선을 떨구었다.


"거짓은 사라지지 않아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씨처럼... 계속 끝까지 타들어갈 거예요."


침묵이 길게 내려앉았다.

벽시계의 초침만이 느리게 시간을 긁고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가 울렸다.


"엄마. 왜 할머니 방으로 부르셨어요?"


문이 열리며 인성이 들어섰다.

고요가 잠시 형태를 잃었다.

오래 눌려 있던 정적이 예고 없이 흐트러지며, 방 안의 공기가 어긋났다.


정자가 길게 숨을 들이켰다.


"인성아..."


말끝이 낮게 가라앉았다.

손에 들린 서류 봉투가 구겨졌다.

힘이 들어간 손등 위로 핏줄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시선이 인성에게로 향했다.

오래 머물지 못한 채, 다시 사진 위로 떨어졌다.

향 냄새가 박힌 정적 속에서 정자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널 낳은 사람..."


인성의 눈빛이 정자를 향해 멈췄다.


"알고 있었어요."


짧고 담담한 대답.


"이미."


정자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서류봉투가 미끄러지듯 손아귀를 빠져나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다.


사진이 뒤늦게 손끝에서 기울었다.

뒤집힌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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