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온 것들 <최종화 추가>

되, 물림

by 밤얼음

재연이 떠난 이후, 인성도 자신의 자리를 비워두었다.


처음 하루는 기다림이었다.

둘째 날은 불안.

셋째 날부터는 견디는 시간이 이어졌다.

연락은 닿지 않았고 흔적조차 잡히지 않았다.


정자는 오늘도 인성의 방에 들어섰다.

이불을 털고, 책상을 닦고, 비워진 공간을 정리했다.

손길이 점점 느려졌다.

휘청이는 몸을, 벽을 짚으며 간신히 버텨냈다.


"인성아..."


대답 없는 방 안에서 그녀의 목소리만 허공에 흩어졌다.


거실.

무룡은 소파에 앉아 있었다.

꺼진 TV 화면이 희미하게 그의 형체를 비췄다.


저녁이 깊어갈 무렵,

두 사람이 식탁에 마주 앉았다.


무룡의 셔츠 단추 하나가 어긋나 있었다.

처음 그날과 똑같이.


밥그릇 네 개.

수저 네 쌍.

식어버린 국, 굳어버린 반찬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때였다.


쿵.


대문을 때리는 둔탁한 소리.

정자의 어깨가 움찔했다.


쿵. 쿵.


"문 열어!!!"


쉰 목소리가 현관을 파고들었다.

무룡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현관문이 거칠게 젖혀졌다.

술냄새와 함께 신만식이 밀고 들어왔다.

비틀거리는 걸음, 붉게 충혈된 눈.

그가 무룡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 자식아."


숨이 섞인 거친 음성.


"인성이 어딨어."


만식의 시선이 식탁 위로 떨어졌다.

그릇 안의 정성스럽게 담긴 음식들.

입술이 비틀렸다.


"한 달이 넘게..."


그의 시선이 다시 무룡에게 꽂혔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가?"


무룡이 뒤로 밀린 몸을 세우며 그의 손을 쳐냈다.


"이렇게 된 거 다 당신 입에서 시작된 거잖아. 왜 여기 와서 행패야."


"... 내 입?"


만식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내 입이 아니라

당신네들 그 역겨운 짓거리에서 시작된 거지."


말이 이어졌다.


"씨받이니 뭐니, 그딴 걸 들여놓는 순간부터 다 틀어진 거였어."


무룡의 턱 근육이 굳었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감각이 번졌다.


"이봐, 강무룡 씨.

금화를 이십 년이나 뒤로 만나놓고도.

아직도 모르겠어?"


정자가 휘청이며 식탁 가장자리를 짚었다.

만식의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인성이."


짧은 정적.


"내 아들이야."


무룡의 시야가 멎었다.

정자의 손에서 떨어진 앞치마가 미끄러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천이 힘없이 구겨졌다.


"... 그게 무슨."


만식의 입이 비틀렸다.


"금화가.

내 애를 임신한 채로 당신 집 들어간 거고.

당신 애를 임신한 채로 나한테 돌아온 거라고."


그리고.

무룡의 숨을 가르는 한 문장.


"내 아들이랑 당신 딸이랑.

바뀐 거라고."


굳어있던 무룡의 손이 만식의 멱살을 잡았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


아무렇지 않게 무룡의 손을 털었다.


"내가 저번에 말했을 텐데.

아주 기가 막힌 우연이라고."


차가운 바람이 그들 사이를 스쳤다.


"... 왜.

왜 그 긴 세월 동안..."


"그야.

내 아들놈만큼은.

거지 같은 팔자 물려줄 순 없잖아?"


만식의 말이 낮게 이어졌다.


"당신네 대는 애초에 끊겼다고."


만식이 웃음이 길게 번졌다.


무룡의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몸이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초점 잃은 시선이 식탁에 걸렸다.

비어 있는 자리들.


이어지는 것도

돌려놓을 수 있는 것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텅 빈 집 안에는 소리만 남았다.




"뉴스 속보입니다. 해안가에서 신원 미상의 남성 시신이 발견됐습니다."




계절은 식어가고 있었다.

푸르던 색은 노랗게 바래고,

바랜 색은 붉게 물들었다.

각자의 색이 뒤섞인 시간 속에서 사라진 이름들만 늘어났다.


결국 모든 색은 지워졌다.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을 데리고

인성이 돌아왔다.

발자국마다, 늦게 도착한 시간의 흔적이 남았다.


그날도 눈이 내렸다.


인성이 시선을 움직였다.

창에 닿으며 녹아내리는 눈꽃은 유리 위에 잠시 머물다 사라졌다.


약국 한쪽.

사과맛 사탕으로 가득 차 있던 유리그릇이 텅 빈 채 놓여 있었다.


모든 것이 바뀌었지만,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인성이 불을 껐다.

빛이 사라지고 잔광만이 느리게 가라앉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걸음을 옮겨 문에 손을 올리던 순간이었다.


익숙한 냄새가 스쳤다.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골목 안쪽.

빛과 그림자가 엉켜 있는 틈.


곱게 정돈해 빗은 머리.

지나치게 덧입힌 진한 화장.

검정색의 원피스.


겨울 공기에 드러난 하얀 살결 위로 눈발이 내려앉았다.


붉게 애린 피부.

재연이었다.


처음 만났던 그날과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마주쳤다.


재연이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담배.

입술 끝에 닿았다가

이내 다시 가방 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깊숙이.


재연이 몸을 돌렸다.

철컥.

인성의 약국 문이 잠겼다.


그대로 등을 진 채 각자의 걸음을 옮겼다.

서로가 서 있던 자리로부터 가장 멀어지는 방향으로.


해가 기울었다.

소리 없이.

저항 없이.


정자는 인성의 방 앞에 멈춰 섰다.

그다음엔 무룡과 함께 머물렀던 방.

갑례의 방.

마지막으로

이미 오래전에 비워진 방 하나.

창가에 늘어뜨려진 커튼이, 저무는 빛을 받아 희미하게 번졌다.

금화를 닮은 보랏빛으로.


정자는 식탁에 앉았다.


어느 순간 사라졌던 자리.

다시 되찾았던 자리.

되돌아오지 않을 자리.

아무도 없는 맞은편 자리와 눈이 마주쳤다.


오래전.

금화의 젓가락이 떨어지던 날.

그것을 주워 들던 무룡의 손.


자신의 손으로 그의 등을 밀어주던 순간.

무룡의 어긋난 단추 하나를 눈감았던 순간.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끝까지 입을 다문 것들이, 끝을 만들고 말았다.


이제야 알았다.

이 집안에서는, 누구의 잘못도 온전히 누구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정자의 손이 천천히 움직였다.

젓가락을 들었다.


잠시 허공에서 멈췄다.

시야가 흐려졌다.


그리고.


툭.


젓가락 한 짝이 힘없이 식탁 위로 떨어졌다.


정자의 몸이 기울어졌다.


빛이 사라지듯.

숨이 식어가듯.


선택은 되돌릴 수 없었고

죄는 물릴 수 없었다.


결국

죄는 다른 모습으로 돌아왔다.


물려준 건 없었다.

죄는 사라지지 않았다.

늦게 돌아왔을 뿐.


돌아온 죄는

이어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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