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만파, 자기 만나 파탄
"바람도 수준이 있는 거야, 경 여사."
사람들은 늙으면 사랑을 못 한다고들 한다.
"늙어도 심장은 안 죽어."
나는 오늘도 벽에 대고 말을 한다.
남편이라는 벽.
"심장 같은 소리 하네."
저 늙은이는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지.
하긴.
사랑 없이 묶인 우리 관계에 뭘 더 바라.
"준수는 내 도파민이었어."
"어린놈한테 돈 쳐바르면서 노는 게 도파민?"
"난 스폰서로서 투자한 거야."
"투자를 주둥이로 하더만? 진공청소기마냥 아주 그놈 입술을 흡입하던데."
남편이 코웃음을 쳤다.
"정작 해야 할 흡입은 따로 있지 않나?"
"뭔데, 그게."
"뭐긴 뭐야. 지방흡입이지."
저 늙은이가.
노망이 단단히 났다.
"아무리 당신이 재벌사모라 해도 그렇지. 준수? 그놈은 비위가 재벌급이야."
우린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함께 유학을 떠났다.
정략결혼.
비즈니스였다.
집안 대 집안.
이쪽 세계에선 흔한 일이다.
흔하지 않은 첫사랑까지 포기시킨 망할 놈의 집안.
남들이 못 누리는 걸 누리는 대신,
남들 다 하는 걸 포기하고 살아야 했다.
'바람은 놀이다.'
남편과의 첫날밤.
근사한 고백 대신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날 남편은 옆방으로 갔다.
쉽게 말하면 '애첩'을 만나러.
대단하신 여배우님.
피는 못 속인다고.
우리 만수도 신붓감으로 여배우를 데려왔었으니까.
"쓸모없는 애는 몇 번 놀았으면 진작에 버렸어야지."
가끔은 궁금하다.
저 양반은
사랑이란 게 뭔지 알긴 알까?
저 양반에게도 첫사랑이 있었을까?
"이실장! 드라이브 가게 차 대기 시켜. 10분."
아니다.
오늘은 동네 좀 걸어봐야겠다.
그래, 조만간 이 살덩어리들이랑도 작별해야지.
평생 붙어 다닌 경호원들이지만
산책까지 따라붙는 건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
그럴 거면 의자라도 하나 들고 나오지.
일머리 없는 것들.
아고 삭신아.
아이고 무릎아.
의자. 의자 어디 없나.
오, 벤치다.
"으잇차아."
벤치에 앉는 것뿐인데 입에서 기합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이실장. 비만클리닉 잘하는데 좀 알아봐봐."
"사모님, 굳이..."
"자네 입은 시키는 일에만 쓰라 했지?"
"죄송합니다."
손수건을 꺼내 코를 세차게 풀어버렸다.
옆으로 훽 던지는 순간.
"이보쇼! 거 쓰레기를 그렇게 버리면 됩니까!"
"뭐라고요?!"
고개를 돌리자 서 있는 한 노년의 남자.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사람.
내 첫사랑.
"... 용건 오빠?"
칠십은 됐을 텐데.
고등학생 때 모습 그대로다.
"영자? 경영자?"
주름까지 섹시한 남자.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저 잠깐 날 채워줄 도파민이 아닌,
진짜 심장.
확실히.
늙어도 심장은 안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