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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민정 Aug 26. 2018

돌과 바람과 맥주

제주맥주 양조장에 다녀왔습니다


제주맥주의 맥주를 마셔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마셔봤다면 '제주 위트 에일'일 가능성이 높다. 귤껍질이 들어간 벨지안 화이트 에일은 풍미가 깊고 끝 맛이 아주 산뜻하다. 제주로 떠나는 여행이 그런 것처럼. 


제주맥주가 만든 첫 번째 맥주는 론칭 초반 ‘제주에서만 판매하는 맥주’로 유명세를 떨쳤다. 최근엔 상경했다.  굳이 상경을 늦춘 이유는 ‘로컬 맥주니까 당연히 지역에서 먼저 인정을 받아야지’였다고. 나는 튼튼한 철학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 내놓는 간결한 대답을 좋아한다. 


제주 위트 에일은 제주맥주 양조장에서 먹는 게 제일 맛있는 것 같다. ⓒ 제주맥주

제주맥주는 제주 한림읍에 연간 2000만 L의 맥주를 생산할 수 있는 첨단 설비 시설을 갖추고 있다. 국내에서 세 번째로 큰 양조장 규모다. (국내 대기업 맥주 제조 회사 두 개, 바로 그다음이다.) 국내 크래프트 브루어리 중에서는 가장 큰 규모라는 의미다. 굳이 제주맥주를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그 규모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직 국내에는 주류문화가 지역의 문화 콘텐츠로 잘 자리 잡은 선례가 별로 없다. 제주맥주는 남들이 잘 못했던 걸 잘 해보려고 했고, 실제로 잘 되고 있는 중이다. 제주맥주는 로컬 브랜드가 일종의 문화로 잘 자리 잡고 있는 좋은 예시인 것 같다. 


제주 맥주는 브랜드 론칭 준비 단계부터 이 거대한 양조장을 제주도를 찾는 이들과 지역 주민이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장으로 만들고자 기획했다. 한림읍에 위치한 양조장에는 양조장 투어를 위한 프로그램, 제주맥주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 테이스팅 랩이 있다. 반짝이는 스틸 소재의 거대한 드럼통이며 파이프관이 복잡하게 이어져 있는 양조 시설은 제조 시설이라기보다 SF영화 속으로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우와 ⓒ 제주맥주

맥주 양조의 주요 공정을 볼 수 있다는 점은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눈요깃거리 그 이상의 의미다. 홉, 맥아, 귤 제스트까지 원재료와 부가 재료를 직접 손으로 만져보고 향기를 맡아볼 수 있다. 마치 요리를 시작하기 전 노련한 셰프가 되어 재료를 점검하는 느낌이었다. 맥주를 음식으로 읽는 것과 그저 맥아가 발효되어 만들어지는 술로 읽는 것은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이란 게 느껴졌다. 


맥주는 분명 어른들이 즐기는 음료인데, 체험장과 프로그램 전반은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부분이 많은 건 좀 특이한 부분이었다. “크래프트 비어, 수제 맥주가 태어난 배경을 보면 제주맥주의 양조장이 이렇게 꾸며진 의미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제주맥주 양조장의 투어 총괄 매니저 김현기 씨가 말했다. 


만지고 맛보고 ⓒ 제주맥주

그와 맥주 양조 시설이 커다란 통창을 통해 내려다보이는 곳을 지나며 얘길 나눴다. 1950년대 미국에서 금주령이 내리고 나서, 집 안에서 소량의 맥주를 제조하는 것은 일부 허용된 이후의 이야기다. 오랫동안 ‘술맛’에 대해 잊고 지내던 세대들은 어느 날 ‘아버지와 어머니가 즐겨 마셨던 그 음료’에 대한 향수를 떠올리고 맥주 양조를 시작했다. “그런 후에야 크래프트 맥주 열풍이 불면서 전 세계에서 지금까지 사랑을 받고 있어요. 부모 세대가 즐겨 마시는 음료라는, 음식에 대한 이해가 문화를 만드는 거죠.” 


맥주 양조장의 프로그램을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구성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제주맥주의 양조장 투어 프로그램은 회차당 20여 명으로 구성된다. 양조장에서 갓 만든 제주 위트 에일을 한 잔씩 맛볼 수 있고, 펍과 전시 공간으로 꾸며진 3층 테이스팅 랩에는 제주맥주와 로컬의 젊은 브랜드들이 만든 굿즈, 음식과 술 그리고 맥주와 관련한 전문 서적도 만나볼 수 있다. 


ⓒ 제주맥주


둘러보고 나니 머릿속에 분명히 생기는 문장들이 몇 개 있었다. 1. 맥주는 그냥 술이 아니라 일종의 음식 문화고  2. 제주 맥주는 확실히 제주를 기반으로 한 브랜드이며 3. 제주의 청정 원료를 활용해 맥주를 만든다니 너무 좋아. 


제주맥주는 이달 새로운 맥주를 출시했다. '제주 펠롱 에일'은 제주 곶자왈을 모티프로 한 맥주다. 각자 다른 여러 식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사는 곶자왈처럼, 다채로운 홉의 풍미를 한 데 어우른 페일 에일이다. 아직 서울에선 맛볼 수 없단다. 로컬에서 인정받고 나면 다시 상경하겠지만, 나는 굳이 제주 펠롱 에일을 맛보러 제주에 갈 거다. 경험에 리미티드가 붙어있으면 그걸 거부하기란 참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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