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마리아의 증언, 인간과 성상의 사이

컬럼 토빈 작가『 The Testiment of Mary 』

by 호야 Hoya

예수 사후 10여 년, 그의 제자들이 마련한 에베소의 거처에서 마리아는 고독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복음서 작성에 착수한 점퍼가 걸쳐진 두 개의 빈 의자로 표상되는 사도들은 그녀를 찾아와 성자의 삶을 ‘성스럽게’ 재구성하기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자신의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의 시작을 그녀는 단호한 목소리로 폭발시킨다. 점퍼가 걸쳐 있지 않은 빈 의자를 난폭하게 끌어당기며 이렇게 소리친다. “그 애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래서 이 의자를 비워둔 거야. 돌아오리라는 희망 때문이 아니라 결코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분명히 기억하기 위해!” 그것이 그녀의 첫 발화이다.


2천 년간 서구인의 종교적 상상력 속에서 엄청난 자리를 차지해온 마리아 복음서의 비중은 미약하기 짝이 없다. 네 편의 복음서를 통틀어 두세 장면에 등장할 뿐이며, 그녀의 육성은 수태고지 장면과 가나의 혼인 잔치 단 두세 군데에서만 언급된다. 아일랜드 소설가 쿨름 토이빈이 밝힌 대로, 이 작품의 목적은 바로 복음서가 침묵시키고 있는 마리아의 인간적인 목소리를 복원하는 것이다. 그 목소리는 복음서 일화들을 재편집. 재해석하는 한편, 예술의 죽음 이후 마리아의 삶의 상상하는 방식으로 되살아난다.



아들의 부활과 신성을 부인하는데, 마리아는 십자가 현 사건 직후 반강제적 유폐 생활을 시작하던 시점을 회고한다. 살이 찢기고 배가 갈려 맹수의 먹이가 되는 참혹한 광경이 십자가에서 온몸이 찢기는 아들의 기억과 겹치지만, 그녀의 어조는 외려 담담하다. 그 고통을 신적인 것으로 승화 또는 성화시키려는 자들의 이야기에 맞서 그렇게 고통받는 인간과 그 고통을 자조한 사명감의 우매함을 말하려는 것이 그녀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신의 아들들’이 조작하는 역사에 맞서 ‘세상의 딸’들이 외치는 허스토리 말이다.






그녀의 회고는 아들의 출세 초기로 돌아간다.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사건의 현장에서 추종자들이 둘러싸인 아들과 어머니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마리아는 복음서 기록에 맞서 자신은 아들을 이 불량한 무리로부터 떼어내려고 그곳에 갔으며 포도주의 기적과는 어떤 상관이 없다고 주장한다. 물이 정말 포도주로 변했다는 사실마저도 의심한다. 자신에게 그 사건은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쳤을 뿐 아니라, ‘여인이여, 내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며 어머니 취급하지 않는 아들에 대한 배신감의 체험이었음을 토로한다. 또한 죽은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켜 세우려는 계획을 듣고, 그것인 어떤 위험을 초래할지 알므로 필사적으로 만유하려고 달려갔더니 이미 살아서 나온 나사로. 그러나 그 이후 나사로의 여생은 빈사 상태의 비참한 삶이었다는 것이다. 이야기하는 동안 마리아는 일상의 노동을 계속한다. 우물에서 물을 긷고 청소하고 빨래한다. 때로는 보이지 않는, 그래서 더 집요하게 느껴지는 사도들을 향해 분노를 폭발, 의자며 탁자며 사다리를 집어던지기도 한다.


그녀가 십자가 사건을 회고한다. 아들에게 닥쳐온 끔찍한 형벌에 대한 어머니의 공포와 공터를 환기하듯, 가시 돋친 뱀처럼 똬리를 튼 철망을 자신의 목에 감고 이야기한다. 저러다 스치기라도 하면, 움찔한 관객들은 그녀가 철조망을 벗어놓을 때까지 긴장한다. 다시금 형장을 끌려가는 아들의 모습과 그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심정을 무거운 사다리를 힘겹게 어깨에 진 채 이야기한다. 형장에 도착하는 순간, 천장에 매달려 밑동이 공중에 떠 있던 육중한 나무 기둥이 무대 바닥을 쿵 치며 내려서면, 기괴하고도 신비한 음향과 맹금류의 날갯짓이 다시 울려 퍼진다. 지고 온 긴 사다리를 나무 기둥에 기대면 기둥머리에 놓인 거대한 수레바퀴가 서서히 돌아간다. 그 순간, 관객은 그 사다리 위로 끓여 올려지는 그녀의 아들을 상상의 눈으로 보게 된다. 흰 나무 기둥이 사람의 형상으로 변하는 것을 보았다. 뒷면이 결박당한 불수리를 보고,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아 먹는 독수리를 보았다.


마리아의 이야기 압권은 순교한 아들을 품에 안고 성모의 슬픔과 긍휼로 바라보는 대신, 형벌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 앞에 무력하게 무너진 평범한 인산인 이 여자는 아들이 숨을 거두는 침상을 차마 지켜보지 못하고 도망을 쳤다는 것이다. 유리 상자를 벗어나 성모에서 여인으로 변하는 순간이 전 세계 수천만 개의 성모상을 뒤흔드는 행위였다면, 아들의 죽음을 잔인한 모성과 한없는 연민으로 지키기보다 ‘겁이 나서’ 도망쳤다는 이 고백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산산이 박살 내는 순간이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본성인 모성조차도 한갓 관념적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폭로’를 촉구하며, 그녀는 가슴 치는 수치심에 단호한 회의주의와 자기주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무엇보다 ‘당신 아들의 죽음은 세상의 구원을 위한 대속’이라는 사도들의 세뇌 공작에 대한 그녀의 반응은 얼음과 같은 경멸이다. 설득을 포기한 사도들이 물러선 후, 그녀는 웅덩이의 수도꼭지를 틀어주고는 흐트러진 집 안을 정리한다. 그녀는 웅덩이의 수도꼭지를 틀어주고 흐트러진 여인의 몸을 물속 깊이 담그며 성모가 아니라 육신의 어머니, 성령이 아니라 피와 살의 여인으로서 비치게 된다.


그녀의 투쟁이 끝난 걸까. 이 세상 모든 이데올로기의 때를 벗겨 내고 성상의 굴레를 벗어나 인간의 일상으로 복귀하는 일은 가능한가. 그녀는 평화를 찾았을까. 자신을 부인한 아들과 화해했을지 아니면, 아들의 존재로부터 자유로워졌을지. 늙어가는 여인으로서 평범한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그녀의 마지막 말에는 아들을 빼앗긴 어머니의 슬픔과 ‘세상을 구하러 어머니가 준 목숨을 내던진 남자들’에 대한 날카로운 책망이 섞여들며 깊은 울림을 일으킨다. “세상을 구한다고? 아니야, 그게 사람 목숨을 내놓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니고말고.” 이 마지막 순간에 성모도 어머니도 아닌 마리아, 여인이자 인간인 마리아를 느낀 것은 그녀가 고된 몸을 씻고 빠져나온 물웅덩이에서 무성한 잎을 단 작은 나무가, 생명의 나무로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대 배경의 거대한 흰 나무 기둥과 대비되며 수평과 수직, 싱그러운 녹색과 메마른 백색, 생명과 죽음, 여성과 남성, 작은 이야기와 거대 담론을 무대 위에 교차시키고 있다.


기(起): 기적의 회고와 어머니를 부인당한 배신
마리아는 아들의 출세 초기를 결정적인 사건이었던 ‘가나의 혼인 잔치’를 회상한다. 복음서에서는 물을 포도주로 바꾼 기적의 시작으로 기록되지만, 마리아는 아들을 추종자 무리로부터 떼어내려 갔을 뿐이라고 증언한다. 그녀는 기적 자체를 의심하며, 자신에게 그날은 아들이 어머니를 부인하고 배신한 체험으로 기억을 끄집어내고 있다.

승(承): 일상과 분노의 저항
마리아는 이야기를 이어 나가며 물 긷기, 청소, 빨래 같은 노동을 계속한다. 그러나 동시에 보이지 않는 제자들을 향해 의자·탁자·사다리를 던지며 분노를 폭발시킨다. 이는 복음서의 신성한 증언에 맞서는 육체적 저항으로, 그녀의 내적 긴장을 무대 위 행위로 드러내고 있다.


전(轉): 십자가 사건과 모성의 붕괴 고백
회고는 십자가 사건으로 치닫는다. 철조망, 무거운 사다리, 흰 나무 기둥, 거대한 수레바퀴 등 무대 장치가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관객은 마치 사다리 위로 끌려가는 예수의 형상을 상상하지만, 극도의 몰입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은 아들의 고통을 끝까지 지키지 못하고 겁에 질려 도망쳤다는 마리아의 고백이다. 이 고백은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산산이 박살을 내는 순간이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본성인 모성조차도 한갓 관념적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폭로’를 촉구한다.

결(結): 신화에서 벗어난 인간 마리아, 새로운 상징

마리아는 웅덩이의 수도꼭지를 틀어주고 흐트러진 여인의 몸을 물속 깊이 담그며 성모가 아니라 육신의 어머니, 성령이 아니라 피와 살의 여인으로서 비치게 된다. 사도들의 “세상의 구원을 위한 대속”이라는 주장에 대해 얼음 같은 경멸로 응수한다. 마지막 순간, 마리아는 씻김의 행위를 통해 무대 뒤에 솟아오른 작은 초록 나무는 거대한 흰 나무 기둥(죽음·제도·담론)과 대비되며, 삶과 죽음, 여성과 남성, 작은 이야기와 거대 담론이 교차하는 상징으로 제시된다.


“세상을 구한다고? 아니야, 그건 사람 목숨을 내놓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 아니고말고.”


애도하는 어머니의 목소리 - 기억과 기록의 충돌
마리아와 예수의 관계는 종교적인 색채는 휘발된 채, 평범한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로서 국한되어 묘사되어 진다. 이때 예수의 모습은 초인적 선지자의 모습보다는 연약한 소녀의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성서에서 예수가 자신의 운명에 관해서 묻는 장면은 많은 사람이 익히 알고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자신과 그 모습을 구경하는 수많은 군중,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도망친 제자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망울 속에서. 그는 하늘을 향해 외쳤다. “알리 알리 라마 사막다리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러한 관점에서 신성과 인간 사이에 위치한 예소의 삶을 동행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바로 우리가 기억하는 히스토리다.


반면, 마리아에게 신성과 인간성이 공존하기 위한 요건은 여성의 완전하고 정숙한 이미지다. 그녀는 수동적인 선량함을 지니며 성으로부터 배제되어 있어 남성들로 하여금 섹슈얼리티에 대한 죄악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 그녀의 순결은 그녀를 상처받기 쉬운 존재로 만드는 한편, 죄를 용서하고 정화하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 그러나 누구도 십자가형을 바라보고 있는 늙은 어미로서 예수를 바라보는 심정은 듣지 못한다. 단지, 제자들의 증언 아래에 삭제된 목소리는 표현되지 못하고 회한과 분노로 사무쳐있다.


<마리아의 증언 The Testiment of Mary>는 Testiment에 증인이라는 의미를 담아냄과 동시에, ‘성서’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마리아의 증언>은 그녀에 의해 대안적으로 서술된 성서로서의 의미를 획득한다. 작품의 중심에는 “성모”가 아니라 “아들을 잃은 한 늙은 여인”으로서의 마리아가 있다. 그녀의 증언은 신성한 복음의 언어가 아니라 애도, 죄책감, 회한으로 가득하다. 따라서 이 작품은 “성모 마리아의 이상화된 이미지”를 벗겨내고, 육신과 감정을 가진 인간 마리아를 드러낸다.


“그가 고통에 비명을 지를 때, 나는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어요. 그러나 그의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지고 피에 범벅이 더 있었어요. 나는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었어요. 내가 알아차릴 수 있는 건 오직 그의 목소리뿐이었어요. 오직 그에게만 속해 있는, 그가 만들어내는 앓는 소리였지요. 나는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어요. 거기엔 다른 것들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어요.”


“아마도 나는 그를 향해 움직여야 했었는지도 몰라요. 어떤 결과가 초래하든지 상관없이,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나는 지금처럼 이렇게 [내가 그랬어야 했다고] 끊임없이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적어도 나는 지금처럼 어떻게 내가 그들을 향해 달려가지 않을 수 있었는지 그들을 떼어내면서 소리를 치지 않았는지, 어떻게 내가 조용히 서서 그 [십자가 처형] 광경을 지켜볼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어요. 그러나 이게 내가 한 일이에요.”


마리아의 증언은 제자들의 기록과 충돌한다. 제자들은 “그는 신의 아들이며, 죽음은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라고 쓰려하지만, 그녀는 “그건 가치 없었다”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갈등은 역사가 기록되는 과정에서 누군가의 기억이 삭제되는 폭력성을 보여준다. 기억은 늘 개인의 기억과 집단의 기록적 서사라는 긴장 속에 존재한다. 예수의 죽음은 마리아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버린 사건이다. 이는 마리아를 고향에서 쫓아낸 종말적 경험이며, 그녀의 존재를 유배와 침묵으로 몰아넣는다. 그 속에서 드러나는 마리아의 증언은 신화화된 성서가 아니라, 억눌린 여성의 목소리와 비탄으로서 또 하나의 성서를 복원하고 있다.


광대와 인간

제자들의 공적 서사에서 광대의 의상을 벗어 던지고 한 인간으로서 거듭난 <마리아의 증언> 뒤에 흐르는 침묵을 느낀다. 이는 “마리아”라는 이미지에 드러나는 사회적 가면으로의 이면을 들여다봄을 통해서 알 수도 있고, 인간적인 모습으로서 촉구하는 마리아의 모습일 수도 있다. 우리는 모두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가길 원하며, 우리의 삶은 증언할지 모른다. 우리는 모두 바보 광대라고.



그들은 그들이 적어 내려가는 것이 세상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세상을요?” 내가 물었다. “이 모든 세상을?”
“그렇습니다.”나의 보호자였던 그가 말했다. “이 모든 세상을 말입니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그녀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그는 그의 동료에게 말했다.
그랬다.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진정 신의 아들이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리고 난 후,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아들의 탄생에 대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내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른 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 동조했다. 나는 거의 듣고 있지 않았다. 나는 내가 그를 임신했을 때 가졌던 처음 몇 달간의 행복을 낯설어하면서도 특별하게 느꼈었다.

(...)

“그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죽었습니다.” 다른 이가 말했다.
“그의 죽음은 인류를 죄악과 어둠 속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그를 십자가형에서 고통받을지도 모르는 이 세계로 보냈던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요?” 내가 물었다. “그의 아버지가…?”
“누가 이걸 알고 있지요?”
“이건 알려질 것입니다” 누군가가 말했다.
“당신들의 말을 통해?”내가 물었다.
“우리의 말과 그의 제자인 다른 이들의 말을 통해서 알려질 것입니다.”
“그를 따르던 제자들을 말하는 건가요?”내가 물었다.
“그들이 아직 살아있나요?”
“그렇습니다.”
“그가 죽었을 때, 그들은 모두 숨어버렸어요.”내가 말했다.
“그들은 그가 부활할 때, 그곳에 있었습니다.”누군가가 말했다.
“그들은 그의 무덤을 봤어요.”내가 말했다.
“나는 그의 무덤을 본 적이 없어요. 나는 결코 그의 시체를 씻은 적도 없어요.”
“당신은 그곳에 있었습니다.”나의 보호자가 말했다.
“당신은 그가 십자가에서 내려졌을 때, 그의 시체를 껴안고 있었습니다.”
그의 동료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거기에 있었어요.”내가 말했다.
“나는 그게 끝나기도 전에 도망을 쳤어요.
하지만 만일 당신이 증언을 원한다면, 내가 바로 그 증인이에요.
나는 당신에게 지금 말할 수 있어요.
당신이 그가 세상을 구원했다고 말할 때, 나는 그건 가치가 없었다고 말할 거예요.
그건 가치가 없었어요.”


- 참고자료


강태경(2014), 『브로드웨이의 유령 : 한 연극학자의 뉴욕 방랑기』, (서울: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황유정(2014), 「애도하는 어미와 기원의 서사- 컬럼 토빈의 소설<마리아의 증언> 읽기」, 『한국예술연구』 제10호,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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