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일 감독 <국보(國寶)>(2025)
제일 교보 이상일 감독의 <국보(2025)>가 일본에서 1200여 명을 관객을 동원하며, 일본 역대 실사 영화 흥행 1위에 올랐다. 영화는 화려한 공연이 펼쳐지는 무대 위와 아래를 넘나들며 가부키 배우, 그 중에서도 여성의 역할을 맡은 온나카나의 인생여정을 들여다 본다. 카부키는 17세기에 탄생한 일본 전통공연예술이다. 에도 막부가 풍기문란을 이유로 여성의 출연을 금지한 이후로 모든 배역을 남성이 연기하게 된다. 그에 따라 온나카타에게는 평생 무대 위에서 여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추구해야 하는 딜레마 속에서 살아간다. 이와 비슷한 영화로 천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1993)>가 떠오르기도 했다. 이 영화는 사변초가에 등장하는 항우와 우희의 비극적 서사가 실제 경극 배우인 시투의 정체성과 일치하며 예술의 정점을 찍게 된다. 이처럼 연극 안에서 일어나는 성별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기의 역사는 현재까지 젠더 프리 캐스팅을 통해 이어지고 있다.
1960년대 야쿠자 수장이 연 연회에서 그의 아들 키쿠오가 하얀 분을 피부에 입히고, 붉게 눈가와 입술을 물들인 후 가부키극 <세키노트>를 연기한다. 그러나 당일 반대파의 습격으로 아버지는 총에 맞고 눈 내리는 설경 속 피를 흘리며 죽을을 맞아하게 된다. 키쿠오는 눈앞에서 죽어가는 아버지를 보며 붉게 물든 눈물을 흘린다. 이후 그는 어머니마저 병으로 여의게 되고, 가부키 명문가인 하나이 한지로에게 맡겨지게 된다. 한지로는 키쿠오의 재능을 알아보고 가문의 견습생으로서 자신의 아들 슌스케와 함께 카부키 배우로서 성장시킨다. 이 둘은 인간 국보가 되기 위한 뜨거운 욕망과 고통에 스스로를 예속시키며, 초월적인 아름다음을 향한 가부키의 세계에 뛰어들게 된다.
키쿠오는 천부적인 재능이, 슌스케에게는 전통을 이어받을 혈통이 있다. 이 둘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서로의 것을 갈망한다. 특히, 카부키는 혈육으로부터 전통성을 물려받는 양상이기에 타고난 연기만으로 매우기 어렵다는 현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둘은 세상이 열광하는 콤비로서 성공적인 데뷔를 마친다. 키쿠오는 어린 시절부터 자신과 함께 해주던 소꿉친구이자 연인인 하루에 가 있었는데, 그녀와 함께 미래를 그리며 결혼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윽고 한지로가 자신의 뒤를 이을 사람으로 키쿠오를 지목하면서 모든 예상을 나가게 된다. 한지로의 뒤를 이어 무대에 서는 날, 키쿠오는 떨리는 손으로 붓을 움켜쥐며 긴장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면서, 슌스케에게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말한다.
"내가 지금 원하는 건 너의 피야. 내겐 나를 지켜줄 피가 없어. 네 피를 담아 벌컥벌컥 들이키고 싶어."
이 날 키쿠오는 연극 <소네자키 신주>에서 인생에 한 획으로 남을 열연을 펼치게 되고, 슌스케는 그 모습을 보며 극장을 나오게 된다. 하루에는 슌스케를 위로하기 위해 뒤따라 나오며, 그 둘은 8년 동안 어디론가 숨어 사라지게 된다. 키쿠오는 어릴 적 자신의 재능을 미리 예견해 주었던 화류계 게이샤 마이와 7살 된 사생아를 낳게 된다. 그는 한 신사에 소원을 빌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해 준다면, 모든 것일 잃더라고 상관이 없다며, 자신의 딸에게 악마와 거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후 한지로의 당료가 악화되고 자라진 슌스케의 이름을 키쿠오에게 물려주게 된다. 길 위에서 사람들의 환호성을 받으며 가마를 타고 가는 키쿠오는 이제 자신을 애타게 부르며 따라오는 딸의 목소리에도 아무런 반응조차 하지 않는다.
무대를 향한 집착은 배우들의 기본적인 태도이기는 하지만, 특히, 키쿠오와 슌스케를 통해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슌스케는 자신의 이름을 되찾기 위해 언론 인터뷰를 진행하고, 키쿠오의 사생아에 대한 기사를 유포한다. 이에 키쿠오는 카부키 배우의 딸인 아키코의 마음을 얻어 무대에 서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아키코의 아버지는 되려 지원을 끊게 되고, 그 둘은 지방 순회를 돌며 가난과 온나타나 배우에 대한 암울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나날들을 살아간다. 그러나 그의 눈빛 안에는 들어 있는 것은 연인을 향한 사랑이 아닌 다시금 이전과 같이 무대에 서지 못하는 아린 열망만이 공허하게 담겨있을 뿐이다.
그러던 중, 당대 최고의 온나카타인 인간 국보 가부키 배우, 오누가와 만키쿠의 호출을 받게 된다. 그의 명성과는 다르게 아늑하고 작은 방 안에서 키쿠오를 맞이하게 된다. 그는 비로소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었다며, 배우란 자신이 어떤 기분이나 상태인지 상관없이 연기를 해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영화 내에서는 두 인물 사이에서 일어나는 최고를 향한 열망이자, 서로의 피와 재능을 탐하는 양상처럼 보인다. 그러며 한편으로는 슌스케라는 인물이 배경 속에 잊힐 수 있었지만, 후반부를 향해 달리며 양상이 달라지게 된다. 그는 당뇨 증상으로 인해 왼쪽 발에 괴사가 일어나고, 무릎 아래로 절망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반대쪽 다리마저 문들어지게 된다면, 그의 생명 또한 위협이 생길 지경이었다. 그러나 슌스케는 자신이 아버지에게 물려받지 못했던 연극 <소네카키 신주>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려나간다. 한쪽으로는 인공 다리를, 다른 한쪽으로는 감각을 잃은 발을 디딘 채, 구급차를 불러야 하는 상황이 도달할 때까지 열연을 펼친다. 그 안에서 관객들이 목격하는 것은 가부키 배우의 환의와 고통이다.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도 짙다. 예술은 인물들에게 때로는 영혼을 송두리째 파괴할 것을, 아름다운 괴물이 되기 위해 인생 전체를 소모하고 바칠 것을 요구한다。
키쿠오는 세상에 하나뿐인 존재인 국보로 거듭나게 된다. 이를 취재하기 위한 인터뷰 사진작가로 등장한 그의 딸은 그의 이기심으로 인해 눈물 흘렸던 어머니를 대변하면서도, 하얀 설경 속에서 펼쳐지는 그의 연기에 대해 박수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흰 눈 위에 흩뿌려진 아버지의 붉은 피를 목격한 어린 키쿠오의 잔상은 영화 내내 반복되어 변주하는 이미지다. 흰 배경은 공연을 준비하기 전 모든 잔상들을 비워내는 배우의 내면이며, 눈과 입가의 칠해지는 붉은 자국은 가슴 안쪽에 깊이 내재되어 있는 깊은 열망이다. 붉게 칠한 눈을 지나 하얗게 칠해진 목덜미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을 떠나보내야만 마주할 수 있는 풍경 속 함께할 이가 없으니 시리나 아름답다.
ⓒ 본 게시물의 2차 사용·인용은 사전 동의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