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만 감독 <돌들이 말할 때까지>(2024)
§ 제작의도
『돌들이 말할 때까지』는 ‘4.3 군법회의’ 피해자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과정의 기록이다. 제주 4.3 군법회의는 두 차례 열렸는데, 1948년 12월 1차 군법회의, 1949년 6월과 7월의 2차 군법회의에서 제주 여성 132명이 전주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2000년 4.3 특별법 제정 당시 ‘수형인’이었던 이분들은 희생 사실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당시 4.3 희생자 신고 대상은 사망자, 행불자, 후유장애자로 한정되었기 때문이다. 2008년 법 개정 이후 희생자로 신고할 수 있었지만, 영화 속에서 이런 내용을 담아내지 못했다.
영화 속 할머니 네 분은 국가기록원의 ‘수형인명부’에 범죄인으로 등재되어 있다. 재심 무죄 판결 이후 그 기록은 삭제되었다. 명부에는 이름, 나이, 직업, 본적지, 복역 장소만 기재되어 있을 뿐이다. 경찰의 조서도 심지어 판결문도 없다. 우리나라 사법사상 판결문도 없는 피의자가 ‘재심’을 청구한 사례는 없다고 했다. 이러한 과정 하나하나를 기록하고 알리기 위해 4.3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4.3 항쟁 제76주년 4월 3일
제주 4.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
§ 제목의 출처
이 영화의 제목 돌들이 말할 때까지는 김소연 시인의 시집 『i에게』에 수록된 시에서 차용되었습니다.
“얘기를 끝내자마자 그가 화장실에 간 사이 나는 창 바깥을 쳐다보았다.
백색의 햇살 너머 북한산을 보았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뭘 보고 있는지 묻는 그에게 나는 날씨가 좋다고 말했다.
버스에 그를 태워 보내고 나는 걸어서 집에 들어왔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의 책을 얼굴에 덮고 잠이 들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들과 우정을 나눌 차례가 왔고 아침이 왔다.
주워온 조약돌 하나를 꺼내어 마주했다. 돌들이 말할 때까지."
김소연 시인 _ 『i에게』돌들이 말할 때까지
§ 대본 줄거리 (plot)
그 크나큰 슬픔의 권능으로 인간의 어리석음을 바르게 다스려 주소서 _제주 4.3 희생자 북촌리 위령비에서
• 양농옥 할머니
밭 한복판을 파헤치며, 산에 빨갱이를 잡아오고 있다는 말로부터 시작된 사건이었다. 토벌대 부인들은 죽은 시신들의 몸에 좋은 것은 모조리 벗겨갔다. 시신들은 비참하게 얼굴과 몸은 전부 부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일본에 열아홉 살에 가서, 열여섯의 나이에 돌아온 할머니는 풍속도 익혀보지 못한 채 4.3 사건을 겪게 되었다. 일곱 명의 군인들이 지붕의 띠를 뽑아 불을 붙이고, 그 집 안에서 꺼낼 수 있는 짐은 한정되어 있었다. 이후에 들려온 집합 명령에 나간 사람들은 가마니를 실은 차에 태워 데리고 가버렸다. 아홉 명은 냇가 건너가서 모두 총살해 버렸다. 아버지는 12월 1일에 잡혀 들어가서, 5일 아침까지 행방이 묘연했다. 황우럭 할아버지와 고봉식 누님, 부녀회장이라는 교장 선생님 누이 그리고 아버지가 탄 차를 발견한 후, 얼굴을 보기 위해 다가갔다. 그러나 9 연대장은 자신과 아버지가 만날 수 없도록 서로 떨어뜨려 놓았다.
당시 시대적 배경은 대동아전쟁(1945, 태평양 전쟁)을 끝내고, 이승만 대통령이 집권하고 있었다. 일제 청산은 법의 질서 안에서 적절히 청산되지 못하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정치 사이에서 나온 희생자였다. 즉, 사상이나 정치에 대한 관계성을 가지고 있던 이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전부 죽은 것이다.
• 박순석 할머니
박순석 할머니는 화북 3구 곤흐레(곤을동) 지하공작에서 당원들과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구분할 수 있는 공부를 했지만, 연병장에서 모두 총살당했다. 1948년 5월 10일 유엔이 분단된 한국의 정치를 안정화하기 위해, 남한에서만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한 시기였다. 이는 미군정의 주관에 따라 제헌 헌법을 제정하고 정부를 수립할 제헌국립 의원 200명을 선출하고자 했다. 선거가 시작되기 하루 전에(5월 9일) 각 마을 지구 사람들은 경찰들의 탄압의 움직임을 읽고, 거문오름으로 올라갔으나 경찰에게 체포되어 전주 형무소에 수감된다. 이들 중에서는 교편을 잡고 있거나 돈의 흐름을 주도하는 마을의 총무 역할을 맡고 있는 직책을 지닌 이들이 많았다. 그렇게 수감된 할머니는 군사 재판에 따라 3년 수감되었다. 여자들이 수감된 감옥 안에서는 잠을 자고 있는 와중에 혼자서 우는 여자들도 있었다. 간수들은 한에 서려 우는 여자들을 향해 독방에 가고 싶은지 물었다고 한다.
• 송순희 할머니
비가 내리는 길로 번번이 핏물이 내려오고, 천 평이 넘는 땅은 사람들이 숨을 공간이 되었다. 경찰들은 세 마을을 한 번에 모조리 태워버리고, 그 사이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총으로 쏘아 죽였다. 그 대상은 어른과 아기 전부 포함되었다. 결국 살기 위해 산에 올라갔고, 깊고 어두운 동굴과 물이 흐르는 냇가는 은신처가 되었다. 그러나 아침에 나와보니 이미 머물 사람들은 경찰들에게 발견되어 총에 맞아 죽고 있었으며, 심지어 두꺼운 대나무로 된 창으로 짤려 죽게 된 이들도 있었다. 서귀포 경찰서로 잡혀 들어간 할머니는 임신한 배 위해 무수히 많은 쌀 가마니를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제주 경찰서에서 군사재판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길로 어떻게 정해지게 되었는지도 모를 형량을 받은 채 전주 형무소로 향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경찰들은 장작으로 마구 때리며, 고문을 하기 시작했다. 형무소 내부는 먹을 것도 제대로 주지 않고, 머리에 있는 이 덩어리가 드글거렸다. 그러고 나서는 군인들이 빼곡히 서있는 곳에서 군사재판에서 이름도 묻지 않고 형량을 부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송순희 할머니는 1년 수감이 되고, 석방된 시어머니는 고향에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경찰들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죽게 되었다. 수감 당시 할머니에게는 세 살이 된 아이가 있었는데, 겁이 나서 울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맞게 된 아이의 다리는 덧이 나서 썩게 되고 피고름이 줄줄 샜다. 이후에 아이가 죽어가서 풀어본 상처 부위에는 뼈가 하얗게 드러나서 옆에 있던 여자 간수가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아이는 죽고, 안동 형무소에서 만난 사람과 가진 딸을 낳게 되었다. 석방한 이후 목숨을 부재하기 위해 재혼한 할머니는, 죽은 줄만 알고 있던 남편이 마산형무소에서 석방했다는 소식들 듣게 된다. 이미 두 아이를 잃었던 할머니는 10년 동안 제주도 근처에도 가지 않게 되며, 당시 나이는 단 스물셋이었다.
+ 수형인 명부: 4.3 도민연대는 제주도민들의 희생 사실들에 대해 적혀있는 수령인 명부 내 2530명에 대한 수형 사실이 있음을 개탄했다. 이 명부가 국가기록원에 유일하게 소장되어 있는 공식문서이며, 진상규명에 대한 조사는 이직도 명확히 이루어진 바가 없다. 이 안에는 각각 사람들에 대한 이름과 본적, 나이, 직업, 연도일자, 형량, 복형 장소가 기재되어 있으며, 전국 열다섯 곳 형무소에 분산해서 수감되었다. 이에 따라 제주 4.3 도민 연대는 지난 2013년 진상조사단을 구성했으며, 전주, 인천, 목포 형무소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더불어 명부에 기재된 생존자의 본적지에 방문하여, 본인, 유족 혹은 마을 지인분들과 접촉하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 김묘생 할머니
당시 사건을 함께 겪은 사람들이나, 수감된 장소에 대해서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할머니, 결국 그녀의 딸이 그 기억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어머니는 자신에게 감옥에 수감되었던 기억조차 공유해주지 않았으며, 다른 마을 사람들을 통해서 간접적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할머니는 아흔 세 살의 지극한 나이에도 간첩으로 몰리게 될 깊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녀는 수감되어 있던 스무날 동안 총 대가리(개판머리)로 맞았다고 한다.
• 박춘옥 할머니
박춘옥 할머니는 스물두 살의 나이에 두 살배기 아기와 4.3 사건을 마주했다. 10월 17일부터 11월 7일까지 산에 숨어 펑펑 내리는 진눈깨비를 봤다. 그들은 바위 주변에 굴에 들어가 돌을 조금 파내고는 그 틈새에서 살아갔다. 먹을 음식은 밤에 아버지가 내려가서 쌀을 구해오면, 주위에 숨은 사람들에게 솥과 같은 생필품을 빌리고 나물에 물을 때서 밥을 지었다.
+ 주정공장 옛터 : 당시 체포된 사람들이 임시로 갇혀 있던 곳
그러나 삼촌과 세 오누이(자신, 남동생, 여동생)가 모두 잡히게 되었고, 의귀리에 잡혀 들어가 매를 맞았다. 서귀포에 가서는 허리띠를 닮은 고무빳다로 맞았다. 당시 때리던 사람이 자신의 팔도 아프다며, 엄지 손가락에 전선을 감아 전기고문을 했다고 한다. 전기를 보내면 사람이 오그러져 기절했다가 살아나면 또다시 매로 두드리고를 반복했다. 감옥에 함께 수감되어 있던 동네 사람이 감옥에 수감된 사람들이 쌀, 돈, 팬티, 신발, 간장 등을 올리며 고문강도를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감옥 생황을 하며 기억에 남는 것은 바느질을 하며 죄수복을 만들고는 했다는 것이다. 함께 수감된 두 살 배기 아이는 밑에 앉혀서 있고는 했는데, 아기의 몫으로 나온 반 사발의 죽이 너무 작아서 결국 영양실조에 걸리고 말았다.
재심 개시 결정은 2018년 9월 3일에 이루어졌으며, 검찰을 즉시 항소할 수 있다. 만일 검찰이 즉시, 항소를 한다면, 재심 개시 결정에 대해서만 고등 법원에서 다투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그러나 즉시 항소하지 않음으로 재심 개시결정이 내려지게 되었다. 재심재판에서 주요한 상황은 피고인이라고 명명된 열여덟 분의 범죄 사실을 검사가 특정하고 그것에 대해 재판부가 판단하는 절차다. 그러나 수령인 명부 외에는 1948 - 1949년에 일어났던 어떤 범죄 기록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다. 피고인들은 죄명도 알지 못한 채 갇힌 감옷생활을 70년이 지나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며, 당시에 맞은 매로 인해서 아직도 어깨 양쪽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2019년 1월 17일 제주 법원 판결을 통해서 4.3 특별법이 제정되고, 2003년에 개정된 진상조사가 이루어지기를 촉구했다. 당일 제주 지방 법원은 4.3 수형인 재심사건에서 수형인 희생자 열여덟 분 모두에게 공소기각 즉, 무죄 판결을 선고했다. 기록이 없기에 이에 대한 공소사실이 특정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당시 1948 - 1949년에 이루어진 군법 회의에는 국방경비법에 정해던 예심절차와 그 이후에 공소장이 송달되는 과정, 모두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어떠한 죄로 자신이 재판을 받는지 적절한 변론을 하기 어려웠다. 그에 따라 공소절차가 법률에 위반하여, 형사소송법 제327조 2항에 근거해서 공고기각 판결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4.3 재심 사건의 문제점은 단순히 유죄 확정 판결의 증거를 찾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총체적인 불법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일을 떠올리면 꽃다운 청춘을 험악하고 허무하게 전부 보냈다는 생각에 마음이 침전되지만, 그저 4.3 사건이 역사적 기록되어 자식 세대에게 기억되기를 바란다. _ 박순석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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