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의 사색적 지연과 《안티고네》의 공적 대립
Ⅰ. 서론 : 연구의 목적
연구의 목적은 애도와 멜랑콜리를 개인의 내면적 정서에 국한된 심리 현상이 아니라, 사회적·정치적 장면에서 작동하는 핵심 정동의 형식으로 재사유하는 데 있다. 특히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함으로써 발생하는 슬픔이 어떻게 사유의 지연, 분노, 불안, 비극적 대립의 형태로 외화되며, 개인의 감정이 공적 영역으로 이행하는지를 탐구한다.
먼저, 역사적·이론적 맥락 속에서 애도와 멜랑콜리 개념의 변천을 정리하고, 사적 감정의 영역인 정동이 인간의 인식, 행위, 윤리적 판단에 미치는 영향을 심층적으로 고찰한다. 이를 바탕으로,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는 멜랑콜리가 사유의 내면화와 사색적 지연의 형식으로 드러나는 과정을 분석하고,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서는 애도가 아곤(Agon)의 대립 안에서 정체성의 경계와 법적·공적 대립으로 전환되는 양상을 들여다 본다.
본 연구는 비극 속 애도가 개인적 상실과 보편적인 정서에 머무르지 않고, 사유의 방식과 행위의 선택을 변화시키며 정치적·법적 갈등을 촉발하는 정동으로 작동함을 밝힌다. 이를 통해 애도와 멜랑콜리가 비극 안에서 어떻게 정치적 의미를 획득하고 규명하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선행연구 고찰
1. 이론적 배경:애도와 멜랑콜리아
의학적 관점에서 보면, 멜랑콜리는 몸이 마음에 일으킨 파문 현상이다. 우리의 몸은 단순히 구성하고 있는 물질이나 세포의 집합체이기 이전에, 그것을 둘러싼 무한한 관계망들의 시간적 침전물이다. 아주 미세한 차원에서 변형된 몸 마디의 경계에서 정신은 부지불식간에 반응한다. 일명 멜랑콜리를 포함한 고통스러운 감정은 더딘 정신이 이미 셀 수 없는 변수들로 인해 변형된 몸에 대해 갖게 되는 알 수 없는 거북함이다. 몸이 맺고 있는 관계망들의 전체는 그 자체를 파악될 수 없으며, 무한히 펼쳐진 관계 고리, 관계의 마디는 한 개체의 특화된 고유성, 개성 등으로 나타난다. 관계의 무한성 내지 타자성과 가까이 접촉할수록, 개체의 낯선 고유성은 강화된다.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새로운 개체가 잉태되듯이, 모든 창조적 대성화는 타자성과의 만남, 헤아릴 수 없는 관계들 마디의 접경에서 일어난다. 즉, 멜랑콜리란 몸으로 상징되는 타자성을 고착된 자기 안에 가두려는 욕망에서 유래한 고통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1.1 분노의 멜랑콜리 _ 칸트
“멜랑콜리에서는 초자아가 의식을 장악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자아는 감히 초자아에 반대하지 못한다. 자아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처벌을 감수한다. 강박증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아 밖에 있는 못마땅한 대상이었던 반면에, 멜랑콜리에서는 초자아의 분노 대상이 동일시를 통하여 자아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이다.”
분노란 자기 정체성의 불인정, 무시, 침해, 파괴 등을 통해 일어난다. 분노의 크기는 자기 정체성이 훼손될 때 발생하는 크기에 비례한다. 정체성의 훼손에서 야기된 고통이 크면 클수록 분노도 커진다. 분노의 크기가 커질수록 분노는 광기로 변모한다. 광기 어린 분노는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어둠의 심연을 드러낸다. 그런데 광기 속에서 분출되는 분노의 파토스는 숨겨진 진실과 도래하는 미래를 밝히는 예언의 힘을 가지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 어원에 따르면, ‘예언하다’와 ‘광적으로 분노하다’는 공통의 어간에 속한다. 광기 어린 분노는 도래하는 파국을 암기하는 불운한 전조이지만, 동시에 예언적 성격을 가지기에 때때로 숭고한 감성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미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숭고는 광기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 고대인들에게 광기는 가혹한 질병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어떤 광기는 신들림, 접신 현상으로 이해되었다. 여기서 신들렸다는 것은 말 그대로 신이 있음을 의미하며, 자기에서 빠져나와 신에 들어서는 모습은 그 자체로 무아지경이자 광기다. 이런 점에서 광적 분노는 더 이상 한 개인으로서의 자기 자신만을 침해하는 데서 오는 분노가 아니라, 보편자인 신을 모욕하는 것에서부터 오는 분노이자 신을 대신해서 신을 모독한 자를 응징하고자 하는 정념이다.
1.2 비극과 멜랑콜리 _ 니체
“본래 고통에 대해 사람을 분격하게 하는 것은 고통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무의미함이다.” _니체
비극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고통을 맺은 관계 방식에서 유래한다. 더 나아가 고통의 무의미를 대처하는 방식에서 유래한다. 그렇다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고통의 무의미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프로이트의 애도 작업이 보여주는 의미화 작업처럼, 나름의 의미와 목적을 찾아주는 의미체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반면, 애도 작업에 실패하여 멜랑콜리라는 정신질환을 겪는 것처럼, 고통을 의미체계 안으로 포섭하는 것이 불가능할 때도 있다. 그 경우 고통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고통을 직시하고 회피하지 않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고통의 무의미와 광기를 인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의미라는 것은 무의미의 심연에 나와 잠시 가상으로 머물다가 다시 자기 존재의 근원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고통의 무의미성은 완전히 제거될 수 없다. 또한, 니체에 의하면, 광기 속에서도 얼마간의 이성이 있다. 그러나 그 광기도 고통과 만나는 하나의 방식이고 그 점에서 고통에 대한 대처방식이라 말할 수 있다. 견딜 수 없는 고통, 어떤 의미망을 통해서도 잡히지 않는 고통은 고통에 고취되어 그것을 향유하는 광기를 통해 대응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다.
1.3 불안의 멜랑콜리 _ 하이데거
불안은 한순간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불안 속에 들어서자마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무의미해져 버린다. 그리고 근원적으로 직접 세계로서의 세계를 열어 밝힌다. 이는 우리가 특정 세계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해 주고, 현존재가 세계-내-존재임을 다시금 확인해 준다는 점에서 멜랑콜리와 닮아있다. 하이데거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는 두려움과 불안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두려움은 세계 내 존재하는 특정한 무엇 때문에 발생하지만, 불안은 현존재 자신, 곧 세계-내-존재 자체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즉, 불안이 직면하고 있는 것은 본래적인 자신과 대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의 자기중심적 존재론에 따르면, 현존재는 고립된 주체가 아니라 ‘세계-내-존재’지만, 그 세계는 다시 ‘자기-내-존재’로 회기한다. 하이데거에게 ‘자기’란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나’가 아니라 세계를 향한 초월과 이행 과정에 존립하는 것이며, 죽음을 향한 자유 속에 있는 자신이다. 자기 존재 전체를 거는 자유만이 본래적인 자기를 확인할 수 있는 길이다. 그래서 자유란 실상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고독이며,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기 존재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고통이고 그 고통을 감내하지 않고서도 자유로울 수도 있는 창작할 수도 없다는 절박함이자, 자유로워야 한다는 또 다른 이름이다. 하이데거는 이 자유의 무거움을 멜랑콜리와 연결 짓고 있다.
하이데거 철학에서 멜랑콜리가 표출되는 지점은 무엇보다 죽음이며, 주된 특징은 엄격한 자기 비난, 죄책감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이때 양심이란 일상 세계에 빠져있는 본래의 자신을 소환하는 행위다. 일상성에 빠진 나와 본래 자기, 숨겨진 자기, 낯선 자기가 부르는 본래 자기로 회귀하도록 재촉하는 정언명령이다. 즉, 자기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무성으로 침윤한 가능성이다. 그로 인해 양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본래 자기의 낯선 목소리에 불안해하고, 일상 세계에 구축된 자아와 본래 자기 목소리 사이에서 갈등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다.
1.4 애도와 멜랑콜리_ 프로이트
멜랑콜리커는 진리를 바라보는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있다. _ 프로이트
마지막으로,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저서 『애도와 멜랑콜리』를 통해서 정동 작업인 애도(Trauer)와 비교함으로써 멜랑콜리의 본질을 밝혀보고자 한다. 멜랑콜리에 대한 기술적 정신의학의 개념 규정이 동요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에 따른 결과를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슬픔은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인 반면에, 멜랑콜리는 소수의 특수한 사람들만이 가지는 비정상적인 감정 상태, 더 나아가 일종의 정신질환이다. 즉, 멜랑콜리는 병적인 슬픔이며, 아물지 못해 계속해서 덧나기만 하는 슬픔이다. 이는 다른 임상적 형태들로 나타나며, 심인성이 아니라 육체적 질병으로 분류되고 있을 정도다.
멜랑콜리와 애도라는 두 상태의 전체 모습은 다른 양상으로 드러난다. 애도는 사랑하는 사람 하는 사람의 상실에 대한 반응 또한 그 사람 대신에 그 자리를 대신에 그 자리를 차지한 추상적인 것, 예를 들면 조국, 자유, 이상 등의 상실에 대한 반응이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영향으로 인해 멜랑콜리가 발현된다. 이유로 사람들이 병적인 성향(Disposition)을 갖고 있다고 의심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애도(슬픔)가 정상적인 삶의 상황으로부터 심각한 이탈을 동반한다고 해도, 그것을 병적인 상태로 간주해 의사에게 보낼 생각을 하지 않는다. 단지, 일정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극복될 것이라고 믿으며,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쓸모없고 심지어 해롭다고 믿는다. 한편, 멜랑콜리는 깊은 고통의 정서, 외부 세계에 관한 관심의 소명, 사랑 능력의 상실, 일하는 데 심리적 어려움을 느낌, 자존감의 저하 – 이는 자기 비하와 자기 비난 속에서 표현되며 망상적 처벌 망상적 처벌 기대로까지 고조된다. 애도에서는 자존감 추락이 발현되지 않는다는 점 외에는 동일하다.
즉, 애도와 멜랑콜리를 비교해 볼 때, 멜랑콜리 환자는 대상과 관련된 상실감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은 자아에 관련된 상실감이다. 멜랑콜리 환자가 내뱉는 온갖 자기 비난의 말을 꾹 참고 끝까지 들어보면 자신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고 있거나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 혹은 그가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다른 사람들을 향한 비난의 목소리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멜랑콜리 증상의 열쇠가 대상에 대한 비난이 자신의 자아로 향하며 투사된다는 점에 찾을 수 있다. 멜랑콜리를 분석하는 프로이트의 주요 개념, 즉 양가감정과 동일화 감정 등의 개념을 통해 상실의 슬픔이 멜랑콜리로 변해가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멜랑콜리는 깊숙이 파고드는 고통스러운 불쾌감, 외부 세계에 대한 무관심, 사랑하는 능력의 상실, 성취를 위한 모든 행위의 장애, 자기 비난과 자기 욕설을 표현하다 못해 망상에 빠져 처벌을 기대할 정도로 커지는 자존감의 실추가 그것이다.”
프로이트가 강조하고 있는 멜랑콜리만의 고유한 증상은 첫째, ‘부끄러움 없는 자기 비난’과 둘째, ‘이유 없는 슬픔’이다. 첫 번째 증상을 살펴보면, 전혀 부끄러움을 표현하지 않고 드러내는 가혹한 자기 학대, 급격한 자존감의 실추, 그것의 극단적 모습인 자살 등으로 드러난다. 이들은 마치 남을 비난하듯이 스스로를 가차 없이 비난한다. 그러나 이 상황 속에서 비난의 화살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상실된 대상에 있다는 사실을 명시할 필요가 있다. 즉, 떠나간 대상 ‘애증이 병존하는 양가감정’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멜랑콜리의 두 번째 특징은 상실된 대상을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슬픔의 경우 상실 대상이 분명히 의식되는 반면, 멜랑콜리는 이유 없는 슬픔으로 규정되었다. 즉, 사랑하는 대상을 잃은 후에 그가 누구인지는 알지만, 무엇을 잃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사랑을 거둘 수 없는 멜랑콜리커는 상실 대상을 무덤이 아닌 자기 가슴에 묻으며, 또 다른 부분으로 만드는 ‘동일화’ 과정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사랑을 주고 나면 그에 상응하는 사랑을 상대에게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타인에게 돌아오는 사랑의 크기는 빈번히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사랑하는 대상은 나와 다른 타인이며,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독립적인 개체다. 그렇기에 사랑과 증오는 같은 뿌리에 속해 있지만, 분노는 대개 표출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랑 대상의 상실은 관계에 대한 양가감정을 관철시키고 드러내는 기회가 된다. 멜랑콜리커는 이를 무의식 안에서 대상에서 고착된 리비도를 방향만 외부에서 내부로 바꾸어 유지하기에 결국 슬퍼도 더 이상 슬픈 이유를 알 수 없게 된다.
“외부 세계의 대상에 대한 자아의 원초적 반응을 표현하면서 그 대상을 향해 발산되었던 적개심이 자아 자신에게 되돌아오게 되면, 자아가 자신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우리가 애도에서 배운 것을 멜랑콜리에 적용해 보면, 이 또한 사랑하는 대상의 상실에 대한 반응일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환자는 자신이 누구를 상실했는지는 알고 있지만, 그 사람에게서 무엇을 상실했는지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멜랑콜리는 어떻게든 의식으로부터 벗어난 대상 상실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것이 상실에 대해 무의식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는 애도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애도 작업이 하는 일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현실 세계에 사랑하는 대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며, 모든 리비도를 이 대상과의 결합으로부터 철회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항이 생겨나는데, 우리는 이러한 반항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의 리비도적인 위치를 기꺼이 떠나려 하지 않으며, 심지어 대체 대상이 그에게 신호를 보내도 그러하다는 것을 일반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 이러한 반항은, 현실로부터 물러나고, 환각적 소망 정신병을 통해 대상에 집착하는 일이 생겨날 정도로 강력할 수 있다. 현실 존중이 승리를 거두게 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나 현실의 명령이 즉시 수행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시간과 점령 에너지를 많이 소모한 후에 하나씩 실행되며, 그동안 상실한 대상은 심리적으로 지속적으로 존재한다. 모든 각 기억과 기대 이때는 리비도가 대상과 결합해 있었다가 등장하고 과잉 점령되며, 거기(기억과 기대)에서 리비도 해소가 수행된다. 왜 현실의 명령을 개별적으로 수행하는 타협 행위가 그렇게 고통스러운지 경제적 근거를 제시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이러한 고통-불쾌가 우리에게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실제로 애도 작업을 마친 후 자아는 다시 자유로워지고 억제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Ⅲ. 연구 문제
본 연구는 비극 안에서 애도와 멜랑콜리가 단순히 보편적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정치적 형식과 주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정동으로 작용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그 과정에서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에서, 애도와 멜랑콜리가 어떠한 정치적 양상으로 발화되는지 그 과정을 비교 분석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다음의 연구 질문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1.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Hamlet)》에서 사랑하는 대상을 잃음으로써 다가온 상실, 즉, 멜랑콜리가 어떻게 아버지의 유령과의 동일시하는 광기 어린 독백과 복수의 지연으로 나타나는가?
2. 소포클레스의 비극 《안티고네(Antigone)》에서는 근친상간의 비극으로 인해 일어난 이오카스테의 자살과 오이디푸스의 자발적 실명 그리고 뒤이은 아버지의 죽음을 함께하던 안티고네가 다시금 테베로 돌아가면서 시작된다. 그곳에서 다시금 만나게 된 두 명의 오빠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케스의 죽음이 어떻게 다양한 아곤 속에서 일어난 정체성의 균열과 공적 공간에서의 대립(confrontation) 이후에 자발적 자살이라는 불복종으로 기능하는가?
Ⅳ. 연구방법
1. 《햄릿(Hamlet)》의 멜랑콜리와 사색적 자연의 정치성
고대 비극에서 ‘운명’이 사건을 주도한다면, 근대 비극에서는 ‘주체’가 그 역할을 담당한다. 세상을 연극 무대로 비유한다면, 고대의 인간은 신이 준 운명대로 연기하는 배우다. 그리고 신은 저 높은 하늘에서 세상사 연극을 연출하고 관람한다. 근대에 이르러 세상의 피안은 점차 사라진다. 그럼에도 여전히 세상을 무대로 비유한다면, 근대의 인간은 배우이자 연출자이며 동시에 관객이다. 따라서 《햄릿(Hamlet)》은 선택적 비극이다. 삶과 죽음, 존재와 무, 행위와 무위 가운데 하나를 택해야 할 선택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나 어느 하나 택하는 일이 쉽지 않다. “Who’s there?”라는 물음으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인간의 정체성과 인간이 존재하는 세상에 대한 고찰을 가져다준다.
그것은 자신과의 거리두기, 즉, 자신과의 분열을 통해서 가능하다. 이는 허구와 실재, 겉과 속의 대립 사이에서 일어나는 괴리를 밝히는 작업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근대적 주체의 전형적인 멜랑콜리를 보여준다. 왕자인 햄릿은 부친이 죽은 후 임종의 자리를 지키지 못했다. 이후 전해 들은 바로는 부친이 독사에 물려 죽었다고 했다. 뒤이어 숙부가 왕의 자리에 앉게 되고 어머니는 왕의 왕비가 된다. 그러나 햄릿의 멜랑콜리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 이면에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이 들끓게 된다. 이는 상실의 대상은 아버지이지만, 그로 인해 잃게 된 것은 숙부와 동침한 어머니로 인해 사라져 버린 아버지의 뒤를 이을 것이라는 자신의 미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즉, 애도와 멜랑콜리를 비교해 볼 때, 멜랑콜리 환자는 대상과 관련된 상실감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것은 자아에 관련된 상실감이다. 멜랑콜리 환자가 내뱉는 온갖 자기 비난의 말을 꾹 참고 끝까지 들어보면 자신이 아니라 그가 사랑하고 있거나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 혹은 그가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다른 사람들을 향한 비난의 목소리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는 멜랑콜리 증상의 열쇠가 대상에 대한 비난이 자신의 자아로 향하며 투사된다는 점에 찾을 수 있다.
“악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로다! 겨우 한 달 니오배처럼 눈물에 젖어 가없는 아버님의 영구를 바라가던 그 신발이 미처 닳기도 전에 어머니가, 그 어머니가 아버님의 동생인 저 숙부와 결혼을 하다니,, 한 달도 못 돼서, 애통해하는 거짓 눈물의 짠맛이 눈동자의 핏발을 채 가시게 하기도 전에 결혼하다니”
햄릿의 독백에서 그는 불결한 육신에 대한 절망을 드러내고 그에 대한 소멸을 갈구한다. 사실상 어머니 거트루트와 숙부의 추한 욕망으로 인해 아버지에 대한 애도조차 하지 못한 분노는 어머니에 대한 혐오로 나타난다. 그는 신속하게 이루어진 어머니의 거짓 애도에 어머니에 대한 믿음과 자신이 애도할 일말의 기회조차 빼앗겨버렸다. 갑작스러운 부친의 죽음에 더하여 어머니에 대한 배신감은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슬픔으로, 이어지고, 결국 총체적인 애도 작업의 실패가 아버지의 망령을 불러낸다. 이는 복수를 명령하는 초자아를 이미지화한 것으로, 햄릿의 심리적 갈등이 만들어낸 허상이다.
친부와 계부 사이의 비교에 드러나는 아들의 심리, 햄릿의 자살 충동, 타락한 어머니의 육신에 대한 아들의 반감. 그리고 자신의 약혼자 오필리아를 포함하여 모든 여성으로 확장되고 있는 여성 혐오 심리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오필리아에게 결혼하여 자신과 같은 죄인을 낳지 말고 수녀원에 들어가라 말한다. 이는 여성의 배신과 타락에 대한 햄릿의 환멸과 절망이 잘 드러난 대사다. 여성 전체에 대한 혐오감은 부패한 인간과 사회에 대한 혐오 그리고 친구인 길던스턴과 로젠크란치의 배신은 그에게 하여금 멜랑콜리에 빠지도록 야기한다.
“네가 천륜의 정이 있다면 침지 마라. 어떤 방법과 수단을 써서라도 복수해라. 덴마크 앙실의 침상이 음란하고 저주받을 근친상간의 놀이터가 되지 않게 해라. 하지만 네 마음을 더럽히지 말고 어미에 대해서 어떤 악한 마음도 품지 마라. 어미는 하늘에 맡겨라. 가슴속 양심의 가시가 네 어미를 찌르고 쏘도록 내버려 둬라”
유령은 햄릿에게 억울한 죽음을 복수해 달라고 당부하고 시동생과 놀아난 어머니의 정절을 회복하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복수하라는 명령은 마음을 더럽히지 말라는 명령과 어떻게 양립할 수 있는가? 이는 사적인 복수가 필연적으로 악과 연결되어 있고, 마음을 더럽히지 않고 복수하기란 어렵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유령의 상반된 명령은 갈등을 고조시키는 원인으로 작동하고, 햄릿이란 인물을 딜레마로 몰아넣는다. 특히, 멜랑콜리에 빠진 햄릿은 세상을 추하고 독기 서린 증기 덩어리로 보며, 복수를 지연하는 자신을 자책하기도 한다. 이것이 해소되는 것은 바로 햄릿의 지연된 사색이 섭리에 따른 공적 복수로 전환되는 지점이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다! 이 포악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마음속으로 참고 견디는 것이 고결한가? 아니면 무기를 들어 끝없는 고통의 바다에 대항하여 이를 근절시키는 게 더 고결한가?”
신이 아닌 인간이 만든 각본은 언제나 엉성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햄릿이 각색한 연극의 시작은 허구이지만, 진실을 밝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복수를 눈치챈 왕은 햄릿을 죽이려는 덫을 둔다. 햄릿을 죽기라는 사주를 받은 레어티스는 검투를 제안하고 그가 마실 잔에 독을 탄다. 또한, 작은 상처에도 햄릿이 죽을 수 있도록 검 끝에 독을 바른다. 그러나 독이 든 잔은 왕비가 마시고, 레어티스의 칼에는 햄릿뿐만 아니라 자신도 찔리게 된다. 햄릿은 자신의 몸에 독이 퍼지기 전에 왕을 찌르고, 독이 섞인 남은 술도 억지로 비우게 한다.
부재한 존재인 유령은 살아 있는 인간의 옷을 입고 말을 걸어볼 수 있는 형상으로 나타나 살해의 전모를 밝히고, 살인자인 클로디어스의 양심을 잡는다. 이처럼 사랑하는 대상을 잃은 멜랑콜리적 감정은 아버지의 유령과의 동일시 과정을 통해 모든 은폐된 것들을 드러내고 위선의 가면을 벗겨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 《안티고네(Antigone)》: 애도의 공적 수행과 정체적 대립
안티고네의 비극적 운명은 먼저, 그의 아버지이자 오빠인 오이디푸스(Oedipus)의 신화에서부터 비롯된다. 기원전 441년 발표된 『안티고네』에서는 애도 과정에서 다양한 관계의 경계선상에서 이루고 있는 정체성의 대립과 공적인 대립이 어떤 양상으로 일어나게 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 헤겔의 『정신 현상학』 정반합으로 귀걸되는 충돌 요소 >
[운명: 저주받은 혈통]
↓
오이디푸스 ─── 안티고네
(비극적 주체: 인식) (비극적 주체: 행위)
↓ ↓
이스메네 하이몬 ─ 크레온
(규범적 순응) (윤리적 중재) (권위적 실정법)
↘
테이레시아스
(초월적 경고)
이 도식은 「안티고네」가 운명의 비극에서 윤리의 비극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각 인물은 숭고의 서로 다른 층위를 대표합니다. 우선, 수직적 축에서는 신의 법과 인간의 법 사이의 분열이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관계를 통해서 나타난다. 수평적 축으로는 안티고네–이스메네 안에서 여성 내 윤리 대비와 크레온–하이몬 사이의 세대 대비가 거울 관계처럼 비추어진다. 이 모든 관계의 경계에 있으며, 윤리적 교차점을 연결하는 인물이 바로 안티고네다.
비극의 시작은 안티고네가 아니라 오이디푸스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테베에 찾아온 돌림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 아폴론 신전에 있는 테이레시아스를 찾게 된다. 이를 계기로 오이디푸스왕 출생의 비밀과 그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 직면하게 된다. 이 진실을 인식하게 되면서, 이오카스테는 자살을 하고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찔러 맹인이 된 채 테베를 떠나게 된다. 이때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의 딸 안티고네가 오이디푸스 왕과 함께 길을 떠나 그를 돌봐준다.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생모와 동침하여 낳은 딸로, 왕족의 신분을 가졌으나 이미 태어날 때부터 근친상간의 죄를 짊어진 인물이다.
안티고네가 테베를 떠나 아케네로 향하고 있는 동안,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 사이에서 나온 두 아들 에테오클래스와 폴리네이케스는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전쟁을 벌인다. 이 사실을 들은 후 오이디푸스는 테베에 돌아오지 못한 채 아테네의 언덕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신과 화해를 이루게 되다. 안티고네가 테베로 돌아오자, 에테오클레스와 폴리네이테스는 전쟁 중 둘 다 전사하고 만다. 그 결과 안티고네의 외삼촌인 크레온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크레온은 외부세력인 아르고스인들을 테베로 끌어들여 전쟁을 이기려 했던 플리네이케스는 반역자라 하여 그의 시신을 매장하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리고, 그 명령을 어기는 자는 돌팔매질을 당해 죽게 될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부터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가 시작된다. 오이디푸스는 ‘진리를 본 자’로서 인식의 숭고를 구현한다. 그는 진실을 알고 스스로의 눈을 찔러 시야를 닫는다. 반면, 안티고네는 ‘말하는 자’로서 비극적 주체로서의 행위를 공적으로 구현하게 된다.
이 작품의 핵심 축은 신의 법과 인간의 법의 충돌, 즉 안티고네와 크레온의 대립이다. 안티고네는 신의 불문율, 즉 죽은 자를 향한 윤리적 의무를 따르는 반면, 크레온은 국가의 질서, 인간의 법을 지키려 한다. 두 사람은 모두 정의를 말하지만, 그 정의는 서로를 파괴함으로써만 존재한다. 안티고네의 언어는 설득이 아닌 선언이며, 그녀의 말은 윤리 그 자체로서의 ‘행위’다. 이 지점에서 비극은 단순한 논리적 대립을 넘어, 이성이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의 폭발 즉, 숭고의 순간으로 전환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애도 작업이 완료되기 위해서는 대상 상실의 운명을 수용하고, 상실한 대상과 리비도의 결합을 해소해야 된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공적 체계에 의해 죽음 혈육의 곁에서 영원한 안식을 찾을 수 있도록 도모하는 것과 아버지로부터 내려온 근친상간의 운명을 정리하는 두 가지 작업에서 모두 실패하게 된다. 결국, 안티고네의 멜랑콜리는 운명에 저항하며, 아테네와 모든 가부장제 사회의 공적 영역 안에서 경계 선상에 선 대변자를 자청하게 되는 것이다.
크레온은 안티고네를 죽이겠다고 하자, 크레온의 아들이자 안티고네의 약혼자인 하이몬이 슬픔에 차서 크레온을 찾아온다. 하이몬은 테베의 백성들이 안티고네의 행위를 명예로운 것을 평가하며, 안티고네를 죽이겠다고 한 크레온은 명령이 옮지 않았다는 방향으로 뜻을 모으고 있다며, 시민들의 의견에 따라 안티고네를 죽이겠다는 명령을 거두어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크레온은 안티고네를 죽이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하이몬은 안티고네가 죽는다면 따라 죽겠다고 한다. 하이몬과의 논쟁 후 크레온은 안티고네를 돌팔매질로 죽이겠다는 생각을 바꾸게 된다. 결국 안티고네는 동굴로 가둬지며 최소한의 음식만 줌으로써 서서히 죽어가는 형벌에 처하게 된다. 안티고네와 하이몬의 사랑은 생의 결합이 아니라 죽음을 통한 연대다. 하이몬은 “살아서 함께하지 못한다면, 죽어서 함께하겠다.”며 자결하고,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에로스(Eros)가 에토스(Ethos)로 바뀌는 순간을 보여준다. 두 사람의 사랑은 단순한 연정이 아니라, 윤리적 결단으로 승화된 숭고한 사랑이 된다. 이후,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크레온을 찾아와 신들이 ‘산 자는 지하에 가두고, 죽은 자는 자신에 붙들어두는’ 크레온의 행위에 노여워하고 있으며 테베가 바치는 제물을 받아주지 않고 있다고 경고하고, 그 노여움의 대가로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이 죽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제야 비극적 운명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크레온이 동굴에 도착하게 되고, 그 안에서 스스로 목을 매고 숨진 안티고네가 죽어있었다. 광분한 하이몬은 아버지 크레온을 칼로 찌르려다가 실패하고,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 자결하고 만다. 크레온만이 살아남아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모두를 잃었다며, 인간은 운명을 피할 수 없으며 운명은 두려운 것임을 외친다.
안티고네가 전개될수록 상실한 대상과 안티고네의 리비도 결합은 해소되기보다는 아버지 오이디푸스와 어머니 이오카스테 그리소 두 오빠들과의 결합이 굳건해진다. 이로 인해 신들의 법과 친족의 윤리 사이에서 비극적 주체로 자리 잡은 안티고네는 근친상간의 자식에게 심어진 수치심과 자기혐오, 폭력성과 자기 파괴, 그리고 존재의 근원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죽음보다 더한 갈망을 상징하게 된다. 안티고네의 죽음은 애도 작업을 완료해 리비도를 회복하며 자궁으로 회귀하려는 행위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상 리비도의 퇴행이다. 그녀의 자아는 완전히 고갈되어 자살에 이르렀으며, 약혼자 하이몬, 그의 어머니 에우뤼디케의 연쇄적인 죽음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비극의 연쇄 효과를 양상한다.
결론적으로, 안티고네의 멜랑콜리는 근본적인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 채, 자신의 이름이 지니는 의미처럼 ‘반-자궁적(anti-uterine)’ 방향으로 향한다. 이는 생명의 기원으로서의 자궁을 회귀의 장소로 삼기보다는, 오히려 그 가능성을 부정하거나 초월함으로써 비극적 운명을 넘어가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멜랑콜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안티고네》의 핵심 갈등은 표면적으로는 크레온과의 정치적·법적 대립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에 있는 안티고네의 멜랑콜리는 소통할 수 없는 비탄이다. 멜랑콜리는 슬픔에 맞서 물(物) 자체와의 분리를 완수하고 동일화 대상이 아버지와의 합일을 완수해야 하지만, 그녀에게 어머니와 아버지는 불분명한 대상이며, 돌아갈 공간과 방향을 상실한 실향적 주체가 된다.
Ⅵ. 결론 및 논의
본 연구는 애도와 멜랑콜리를 개인의 내면적 정서에 한정된 심리 현상이 아니라, 비극 속에서 사유와 행위, 그리고 정치적 질서를 재구성하는 핵심 정동으로 재사유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햄릿》과 《안티고네》를 분석 대상으로 삼아, 동일한 상실의 정동이 서로 다른 역사적·윤리적 조건 속에서 어떻게 상이한 정치적 형식으로 전개되는지를 비교하였다.
먼저, 《햄릿》에서 멜랑콜리는 사유의 내면화와 지연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햄릿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애도 작업을 수행하지 못한 채, 상실의 대상과 동일시된 멜랑콜리 속에서 복수라는 행위를 끊임없이 연기한다. 그의 사색적 지연은 단순한 우유부단함이 아니라, 사적 감정과 공적 정의 사이의 균열을 사유로 감당하려는 정치적 긴장 상태로 이해될 수 있다. 이때 멜랑콜리는 행위를 중단시키는 병리적 상태가 아니라, 은폐된 권력과 위선을 폭로하고 복수를 공적 정의의 차원으로 전환시키는 매개로 작동한다. 한편, 《안티고네》에서 애도는 사유의 내면으로 수렴되지 않고, 공적 공간에서의 행위와 충돌로 즉각적으로 외화된다. 안티고네는 죽은 자를 애도할 권리를 박탈하는 국가 권력에 맞서, 자신의 몸과 언어를 통해 윤리를 수행하는 주체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녀의 애도는 프로이트적 의미에서의 애도 작업을 완료하지 못한 채 멜랑콜리로 고착된다. 상실된 대상과의 리비도 결합은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오이디푸스 가문의 비극적 운명과 친족적 혈연의 질서 안으로 더욱 깊게 퇴행한다. 이 지점에서 본 연구는 안티고네의 멜랑콜리를 ‘반-자궁적(anti-uterine)’ 방향성으로 개념화하였다. 이는 생명의 기원으로서의 자궁으로 회귀하려는 충동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생성과 재생의 가능성을 거부하고, 근원적 운명 자체를 초월하거나 파기하려는 자기 소멸적 충동에 가깝다. 안티고네의 자살은 애도의 완결이 아니라, 애도에 실패한 멜랑콜리가 선택한 극단적 윤리 행위이며, 그 결과는 연쇄적인 죽음과 비극의 확산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안티고네》의 핵심 갈등은 표면적으로는 크레온과의 정치적·법적 대립으로 보이지만, 그 근저에는 오이디푸스 가문의 비극적 유산과 가족 내부에 축적된 근원적 갈등이 자리하고 있다. 안티고네의 행위는 국가 법과 신의 법의 대립을 넘어, 친족 질서와 주체성의 붕괴, 그리고 애도 불가능성 자체를 드러내는 비극적 사건이다.
이처럼 《햄릿》과 《안티고네》는 동일한 상실의 정동을 출발점으로 삼으면서도, 각각 사유의 지연과 공적 대립이라는 상이한 정치적 형식을 생성한다. 이를 통해 본 연구는 애도와 멜랑콜리가 비극 안에서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주체의 위치를 재편하고 정치적 질서를 흔드는 정동임을 확인하였다. 나아가 본 연구는 애도 불가능성이 개인의 보편적 전서로 환원될 수 없는 문제이며, 오히려 사회와 법, 윤리의 한계를 드러내는 비극적 사유의 출발점임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의의를 가진다.
++ 오지현(2024), 《사채를 재현하는 정동적 육체와 시적 영상》, 영화와 미디어 낯선 경계, 매개하는 연구들
소포클래스의 비극 《안티고네》에서는 자신의 오라버니이며, 작은 아버지인 플뤼네이테스의 시체 앞에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시체를 묻어주기도 하는 안티고네의 이야기가 나온다. 결론적으로 안티고네는 이러한 자발적, 그러나 금기된 '반역자 사체 수습' 행위를 통해 죽음을 맡는다. 라깡의 《세미나》 관점에서는 안티고네의 심리적 증상을, 금기시된 근친상간으로 이루어진 가족 관계상 기존의 어떤 언어로도 애도할 수 없는 슬픔, 애도의 공백과 애도의 상실이라는 정동으로 묘사한다. 이로써 사체를 수습하는 안티고네의 행동은, 금기시된 자신의 기원을 둘러싼 언어적 공백을 사체로써 애도하는 행위, 사체 수습을 통해 자신의 정동을 표현하는 행위, 법의 위반과 처벌을 감수하는 행위, 또한 그러한 위반을 통해 스스로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애도의 공백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행위, 끝으로 자신의 죽음을 빌어 애도에 완전히 성공 또한 실해하는 행위하고 할 수 있다.
본고는 안티고네의 '반역자 사체 수습' 행위를 현대예술의 특정한 작업경향을 분석하는 데 유의미한 것으로 이해하며, '사체를 재현하는 정동적 육체와 시적 영상'이라는 주제를 통해 여성 작가의 영상 작업과 그 서사적. 형식적 특징을 분석한다. 영상의 내적 기술에 집중하고자 단 채널영상으로 논의를 한정하며, 구체적인 분석 전제와 분석 대상을 제시하기 앞서 먼저 오디오비주얼 영상매체를 안티고네의 이야기의 '사체'와 '반역적'인 '수습행위'와의 연관에서 바라볼 지점을 제시한다. 스크린 위 환영으로 기입된 육화된 신화와 그와 결부된 기호이미지로서 죽음이 아닌, 질료와 형식을 통한 말 그대로의 죽음의 재현(과 물질로서의 '사체')에 주목한다. 또한 구조주의 영화의 반환영주의나 에리카 발솜의 새로운 구성주의 담론을 통해서도, 죽음의 물질적 재현으로서 사채 재현을 주류 영화의 기존 법체계를 '반역'하는 안티고네의 위반과 '수습'의 수행적 맥락과 연관시킨다. 다음으로 안티고네의 반역자 사체 수습 행위에서 비롯된, 영상 작업을 위한 분석 전제를 몇 가지로 제시한다. 사체라는 대상을 다룰 것, 작가가 능동적으로 오디오비주얼 작업을 실천할 것, 사체를 재현하는 데 있어서 육체성의 신화를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작가의 육체 또한 스크린이라는 법칙 속에서 자발적 죽임을 당하는 것, 육체성의 신화가 거부된 사테는 죽음의 정동 표현으로서 구체적인 육체(물질)로 스크린에 기입될 것, 그렇게 작가는 스크린에 기입된 정동적 육체(물질)의 설계자, 즉시 이면의 시인으로 존재할 것 등이다.
본론에서는 세 가지 양상과 함께 여성 작가의 영상 작업을 제시한다. 먼저, 파운드푸티지라는 물질적 사체 작가의 육체적 정동을 표현하는 재료로 사용하며, 작가는 스스로의 육체는 재현하지 않되 파운드푸티지 물질의 변형을 통해 소멸의 과정을 관조하는 경우다. 페기 아웨시(Peggy Ahwesh)의 <The Color of Love>(1994)와 제니퍼 리브스(Jennifer Reeves)의 <Landfill 16>(2011) 등을 제시한다. 다음으로는, 작가가 조현한 시간 형태와 분식의 정동으로써, 현재화 불가한 사체와의 접속 과정을 기록한 다큐멘터리는 작가의 육체는 재현하지 않되 정동 표현들의 중첩으로만 지탱되며, 사실상 접속의 성공도 실패도 아닌 작가의 작업 과정에 대응하는 서사를 직조하는 기법을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작가은 육체 재현을 배제하는 것은 물론, 대상이 되는 사체의 표현 또한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물질적 유비의 과정을 동반한다. 차재민 작가의 <광합성하는 죽음>(2024)을 제시하며 이미지뿐 아니라 네레이션상의 특징에도 주목한다. 이렇듯 사체를 재현하는 시적 영상은 해체가 아닌 새로운 구성주의적인 관점에서 능동적으로 죽음을 물질화할 지워진 역사 쓰기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