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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4년 존 필립스 선장이 작성한 당시의 해적 행동 규칙은 평등주의적인 사상을 내세웠다. 그 조항 중에는 전체 선원이 중요한 결정에 대해 평등한 투표권을 갖고, 모두가 신선한 보급품을 얻을 권리를 소유하며 갑판 위의 모든 범법 행위에 대해서 똑같은 처벌을 받는다는 것 등이 있었는데, 심지어 선장과 병참 장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림과 사진으로 보는 해적의 역사 P.89>
각종 영화나 만화 등의 문화 콘텐츠를 통해 해적에 대해 무수히 접해왔지만 단 한 번도 '평등한 관계'와 연관 지어서 생각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일반적인 해적에 대한 이미지는 선장과 선원의 맺는 계약상의 상명하복 관계가 아니라 무고한 사람에게는 잔혹한 일을 서슴지 않지만 배 안에서는 혹사당하는 부하와 질서유지라는 명목하에 기분에 따라 가혹한 처벌을 일삼덤 무자비한 두목의 모습에 더 가까웠겠죠. 하지만 한걸음 더 들어가서 살펴본 해적의 삶은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에 따른 평등 지향적 관계였습니다. 폭력이 일상적인 삶을 사는 흉악한 사람이 가득한 배 안에서 직위가 높다고 부하들을 함부로 대했다가는 해적질에 착수하기도 전에 선상반란으로 상어 밥이 되기 십상이었을 테니까요.
근대 이전의 많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교육'이라는 단어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었을 해적들조차 가혹함이 불러올 치명적인 파국에 대해서는 두려워했습니다. 그런데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 사회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자리에 위치한 사람들이 가까운 거리에서 일하는 부하 직원들을 함부로 대했다가 호된 꼴을 당했다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들리는 것을 보면 요즘 성공한 사람들은 목숨을 내놓고 활약하던 과거의 해적들보다 더 대담하고 자신의 능력에 확신을 가지고 사는 듯싶습니다. 물론 그런 자신감은 자발적으로 상어가 우글거리는 사형대로 뛰어들기 전까지만 유효하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