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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Apr 21. 2021

아들을 보고 왔어요

운전과 피곤과 사기와 가족. 나는 서민이다.

부산에 사는 둘째를 보고 왔다. 동기는 순수하고 단순했다. 아들이 보고 싶었고, 아들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싶었다. 현장 영업직인 아들은 명절에도 언제나 얼굴만 잠깐 비추고 가기 바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이 자주 그렇듯 예상치 못한 문제들로 힘든 하루였다. 


아들은 우리 부부가 도착한 지 30분이 지나서야 집 앞에 나왔다. 아니, 40분인가? 아무튼 기다리는 시간이 무척 지루하고 힘들었다. 오전 일을 마치고, 늦은 점심을 같이 먹기 위해서 부랴부랴 출발했기 때문이다. 아들의 집은 도심 한복판이었다. 비좁은 소방도로라 주차할 데가 없어 여기저기 눈치를 봐가며 잠깐씩 주차를 해야 했다. 부모가 멀리서 왔는데 미리 준비하지 않은 아들에게 점점 짜증이 났다. 


아내에게 계속 툴툴거리는 와중에 아들은 전화를 잘 안 받았고, 그러다가 아들이 나왔다. 옛날 같았으면 바로 짜증을 냈겠지만 좋은 날을 망치고 싶지 않아 가볍게 한 마디만 했다. 


장거리 운전으로 지쳐 있는데, 점심 먹으러 기장까지 가자고 한다. 네비로 찍어보니 30km가 넘는다. '그냥 가까운 데서 먹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아들 생일이니 아들이 원하는 식당에 가야 한다는 생각, 부산 온 김에 덤으로 바다도 보고 싶다는 아내의 바람에 입을 꾹 다물고 기장으로 출발했다.


부산에 오면 나는 자주 헤맨다. 네비의 '잠시 후'라는 멘트가 정확히 몇 m를 말하는 건지, 바로 앞의 교차로인지, 조금 더 가서인지 항상 헷갈린다. 내가 사는 소도시는 잘못 들어서면 돌아 나오면 그만이지만 대도시 부산에서는 길을 한번 잘못 들어서면 돌아서 원점으로 오기가 무척 힘든다. 별생각 없이 한 차선으로 계속 진행하다가 갑자기 갈림길이 나타나면 뒤따라오는 차들 때문에 미처 차선 변경을 못하고 엉뚱한 곳으로 가기 일쑤다. 제대로 가고 있는데도 자주 등장하는 '경로를 재탐색합니다'라는 카카오 네비의 안내 멘트도 불안감과 헷갈림을 가중한다.


기장 가는 길에서 또 실수가 재현됐다.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갈림길에서 다른 방향으로 들어선 모양이다. 갑자기 아들이 "어, 이 길이 아닌데" 한다. 결국 피곤한 30km에 가중치를 받아 대략 50km를 달려서야 그놈의 식당에 도착한 것 같다. 벌일까? 뭘 잘못했지?


아들을 기다릴 때부터 꼬이더니 시간은 벌써 오후 5시가 다 됐는데, 웨이팅을 해야 되고, 우리 순서는 다섯 번째란다. 낮엔 따뜻했던 날씨가 갑자기 변덕을 부려 바람이 엄청 불어댔다. 아들이 다른 식당에 갈까 하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나는 운전에 너무 지쳐서 기다리는 쪽을 택했다. 춥고 배고프고 피곤했다.


드디어 입성. 코로나를 비웃듯 식당은 인파로 북적거렸다. 대기에 아랑곳 않고 끊임없이 사람들이 밀려들었다. 내가 안도의 한숨을 쉬며 화장실에 갔다 오니 이미 주문을 한 상태였다. 그런데...


아들이 우리에게 맛 보이려 했던 그 메뉴는 중단이 돼서 다른 메뉴를 시켰단다. 기다란 뼈에 살이 조금 붙은 무슨 소 등갈비(?)였다. 그 뼛조각 하나가 500g이고, 5만 원이었다. 까만 옷에 까만 장갑을 낀 종업원이 고기를 구워 주었다. 가열이 잘 안되는지 거의 3분 동안 계속 불판을 향해 온도측정기를 찍는다. 배가 고파 반찬으로 나온 풀떼기라도 주워 먹고 싶었지만 종업원이 떡하니 서있으니 그러기도 불편하다. 


고기가 대략 익자 종업원이 가위로 살을 분리해서 잘라준다. 덜 익은 상태로 자르려니 잘 안 잘린다. '조금 더 익혀서 자르는 게 맞는데' 속으로 중얼거린다. 다 자르고 나니 대략 열 조각이다. 엄지손가락 반만 한 크기가. 하하. 먹을 게 없어서 헛웃음이 나온다. 이게 5만 원이라고? 이걸 먹으려고 사람들이 저렇게 줄을 서 있다고? 


나는 이해가 안 됐다. 고기가 부드럽긴 했지만 입안에서 잠시 느끼는 부드러움 두 조각을 맛보려고 이 고생을 해? 온통 검은 유니폼과 검은 장갑도 맘에 안 든다. 저래서야 위생 상태를 확인할 길이 없잖아. 종업원이 고기를 굽는 중간에 향을 뿌려드릴까 묻는다. 아들이 OK 하자 앞치마 주머니에서 무슨 모기약 같은 스프레이를 꺼내서 고기에 마구 뿌린다. 정체를 알 수 없는데, 깨알 같은 글씨가 많은 걸 보니 식품첨가물이 엄청 많이 들어간 인공 향 같다. '하, 난 고기 본연의 맛이 좋은데...'


당연히 양이 부족해 아내와 아들이 협의해 3만 원짜리 갈비를 하나 더 주문한다. 고기 맛이 다르다. 이건 질기다. 메뉴판 어디에도 그런 안내는 없다. 5만 원짜리로 살짝 맛을 보여주고, 추가 주문은 3만 원짜리 싸구려로. 사기당한 기분이다. 


억울한 마음에 인근 삼겹살 집을 검색해 본다. 당장 일어나서 저렴하고 푸지게 먹을 수 있는 삼겹살 집으로 옮겨가고 싶은 심정이다. 역시 나는 태생이 서민이라고 확신하면서. 하지만 그러기에도 애매한 상황. 맛이 별로 없는 된장찌개와 밥으로 대강 배를 채운다. 욕구불만 지표는 매우 상승된 채로.


힘들고 맛없고 포만감도 없는 식사를 끝내고 나니 이미 해가 기울었다. 우리는 커피를 사들고 바닷가에 가서 오손도손 얘기를 나눌 작정이었지만 날씨는 더 추워지고, 바람은 더 심하게 불었다. 용소 웰빙공원, 신평 소공원, 송정해수욕장을 차례로 방문했다. 가는 길이 너무 힘들었다. 가다 서고 가다 서는 신호도 너무 힘들었고, 동서고가로에서 또 한 번 길을 잘못 들어선 바람에 사서 고생을 하고 말았다. 힘들게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산책을 할 수 없을 정도의 바람과 추위 때문에 우리는 대강 흉내만 내다가 곧 차로 돌아오고 말았다. 아내 말대로 거의 90%를 차 안에서 보낸 하루.


이제는 내려가야 할 시간이다. 피곤과 짜증과 욕구불만이 밀려오는데 또다시 120km를 달려야 한다. 정말 운전이 싫다. 대지진이 나서 사람 빼고 차들과 차 만드는 공장만 모조리 땅 속에 들어가 버렸으면 좋겠다. 다시 원시 사회로 돌아가면 오염도 없어지고, 차가 없으면 또 없는 대로 살아질 것이다.


아들은 사회 초년생 때 영업에 소질이 있어 돈을 꽤 벌었다. 하지만 가난한 아버지를 보고 자라서인지 빨리 성공하고 싶은 욕심에 여기저기 카드빚까지 내서 무리하게 투자하는 바람에 지금은 수천만 원의 빚에 시달리는 신세가 됐다. 힘들게 일해서 생활비 말고는 모두 빚 갚는데 쓴단다. 사람한테 지쳐서 휴일이면 애견카페에 가서 위안을 얻거나 송정해수욕장에서 홀로 맥주 한 캔을 마시면서 마음을 달랜단다. 


아내도 나도 맘이 짠하다. 돈이 있으면 한 번쯤은 시원하게 아들 빚을 갚아주고 싶지만, 나 역시 몇 번의 실패 끝에 빈털터리 신세. 비단 아들뿐이겠는가? 돈이 여유 있으면 챙겨할 사람은 엄마, 장모님, 동생 등등... 내가 하고 싶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다.


집에 돌아와서는 마트에 가서 먹을 걸 잔뜩 샀다. 점심 겸 저녁으로 한 끼를 먹은 데다가 마음속은 욕구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김밥과 순대와 막걸리로 자정의 저녁을 먹는데, 몰랑몰랑해서 고른 재고떨이 순대 밑에는 말라비틀어지고 큼직한 간이 숨어 있었다. 양이 전체의 3분의 1이나 됐다. 이런... 또 사기당했다.


정말 피곤하고 힘든 하루였다. 난 역시 시골 체질인가 보다. 도시의 많은 아파트들과 차들과 교차로의 신호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파온다. 가는 족족 신호 앞에 대기를 하고 있노라면 정말 미쳐버릴 것 같다. '결혼은 미친 짓'이 아니라 '운전은 미친 짓'이라고 소리 지르고 싶다.


운이 좋아서, 현재 내가 하고 있는 것들 중에 뭔가가 잘 풀려서 아들과 함께 시골살이하는 꿈을 꿔본다. 마당에 똥개 한 마리 키우고, 닭 키워서 유정란도 삶아 먹고, 황토구이도 한번 해 먹어 보고, 둘째와 내가 어리고 젊었을 때 그렇게 자주 다녔던 민물낚시도 같이 다니고...


별채를 지어서 엄마와 장모님도 같이 살면 더 좋지 않을까? 50줄의 나도 이런데 홀로 계신 엄마와 장모님은 뭐 그리 대단한 낙이 있을까?




피곤에 절어 곯아떨어지면서도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 가난하지만, 부족하지만 그래도 내 능력 안에서 무뚝뚝하게, 무관심하게 대해왔던 과거보다는 좀 더 잘해보자. 가족이 모른 체하면 외로운 영혼들은 누구에게 등을 기대고 고단한 인생살이를 쉬어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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