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새 Apr 26. 2021

사과 없는 인생

사과를 저축하지 마세요

M의 아버지(Y)는 치매 초기다. 술을 그렇게 드셨으니 알코올 치매다. 이전에는 둘째 아들 M에게 자주 전화를 해서 안부 전화를 안 한다고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이젠 이런저런 전화가 일체 없다. 그렇게 자기 자랑에 열을 올리고, 달변가였던 Y는 이제 거의 말이 없고 힘없는 노인으로 하루하루를 소일하고 있다.


Y의 첫째 아들 B는 아버지와 연을 끊은 지 오래다. 엄마를 버리고 자기 멋대로 산 Y의 삶을 용서할 수 없는 모양이다. 명절에는 물론이고, 몇 년이 지나도 단 한 번도 안부 전화를 하지도 않고, 안부를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Y는 첫째가 보고 싶은 마음이 많았지만 이제는 치매를 앓는 뇌 속에서 그 욕구마저 희미해지는 모양이다. 가끔씩 둘째 M에게 B의 소식을 물어보는 게 전부다.


M의 기억으론 Y는 단 한 번도 전처와 자식들에게 젊은 날의 과오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를 한 적이 없다. 왜 그랬을까? 자신의 잘못을 정말 깨닫지 못했던 걸까? 체면 때문이었을까? 이제 저물어가는 Y의 삶에서 진심 어린 사과를 할 기회는 점점 사라져 간다. 아니, 앞으로 그럴 별로 가능성이 없어 보이니 이미 거의 사라졌다.


J의 아버지(S)도 J가 어릴 때부터 딴살림을 하며 엄마를 무던히도 괴롭혔다. 심지어 다른 여자를 집에 데리고 들어와 본처와 함께 살기도 했다. 시대가 잘못 가르친 '이혼을 절대 안 된다'는 규율에 얽매인 J의 엄마 A는 소심한 성격 때문에 그 모든 분노와 스트레스를 표현하거나 풀지 못했다. 결국 A는 중얼중얼 혼잣말을 자주 하고, 과대망상에 시달리는 병을 얻게 됐다.


J의 언니 E 역시 M의 형 B처럼 아버지와 연을 끊었다. 아버지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영감'이라고 부르지 아마. 엄마의 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 아버지라 믿는다. S도 현재 치매다. 그나마 심성이 착한 둘째 아들 O의 집에 기거하는데,  O도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기는 매한가지여서 최소한의 수발만 해드린다. 찬밥신세다.


S 역시 단 한 번도 아내와 자식들에게 사과를 한 적이 없다. 언제나 호통, 큰소리만 쳤다. 자신의 바람과 딴살림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었다고 정말 믿는 걸까? 운명이었든 본인 스스로 선택한 욕망이었든 상처 입은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도 많다면 적어도 한 번이라도 진정한 사과를 해야 하지 않나.


하지만 S도 이제 치매와 노화라는 벽에 갇혀 버려서 누구와도 소통이 없다. 사과는 물건너갔다.


이렇게 Y와 S의 인생은 저물어 간다. 아내와 자식들에게 좋은 남편, 좋은 아버지로 기억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상처와 복수심까지 남긴 그들의 인생이 쓸쓸하게 가라앉는다.


인생 잘 살기란 쉽지 않다. 아니 힘들다. 삶 자체가 고난이고, 유혹은 도처에 있다. 여태 나와 당신이 상처 준 이들은 몇이나 될까? 얼마나 깊은 상처를 줬을까? 우리는 잘 모른다. 내가 그가 아니라서, 살기가 바빠서 그렇게 섬세하게 신경 쓰지 못하고 살았다.




그래도 정신이 말짱할 때 과거를 복기해서 사과할 건 사과를 해야 한다. 타인의 인생을 망쳐버린 것만큼 큰 죄가 있을까? 인생을 망치기 전에 상대방의 수년을, 하루를, 기분을 망쳤는가. 그렇다면 미리미리 빨리빨리 사과를 하자. 사과는 쌓아두는 게 아니다. 저축하는 게 아니다. 죽을 때 유산은 안 남겨도 되지만, 상처를 남겨서야 되겠는가.


매거진의 이전글 아들을 보고 왔어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