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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Apr 27. 2021

옛날 포장 에이스가 더 맛있는 이유

배열을 달리 하면 / 공간의 마술

에이스는 전지분유와 가공유크림이 들어있어서 그런지 커피와 궁합이 맞다. 식감이 부드러워서 이빨이 시원찮은 중장년에게 부담이 없다. 짱구 같은 과자보다야 이빨이 손상될 위험이 훨씬 적다. 씹는 행위는 어느 정도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므로 과자가 그다지 몸에 좋지 않다는 걸 알지만, 퇴근 후 커피 한잔의 여유를 부릴 땐 커피의 파트너가 된다.


마트에 가면 두 종류의 에이스가 있다. 하나(A)는 옛날 방식 그대로 포장된 제품으로 세 개들이 묶음이 비닐로 묶여 있다. 다른 하나(B)는 먹기 좋게 개별 포장돼서 종이 박스에 들어있는 제품이다. 나는 g당 가격을 꼭 확인하고 사는 알뜰한(쪼잔한) 남자다. 두 제품의 g당 가격은 똑같다.


가격이 똑같음에도 나는 옛날 방식으로 포장한 제품이 더 끌렸는데 왜일까? 오늘 핵심 원인이 떠올랐는데 나머지 요인을 포함해서 정리해 본다.(당근 순전히 내 기준이다)


1. A는 포장이 유광비닐, B는 무광비닐이다. 빛이 반사될 때 A가 좀 더 식욕을 자극하는 것 같다.


2. A의 1 포장당 내용물이 많으므로(전체 용량은 같지만), 인간의 소유욕을 더 만족시킨다.


3. A의 경우, 풍만한 바디에서 외피를 벗겨내는 쾌감이 있다. 심지어 뜯기가 약간 힘들기까지 하기 때문에. 반면 B는 외피가 헐렁헐렁하다.


4. 핵심요인. 내용물(과자)이 서로 밀착돼 있으므로 수분과 유분을 더 오래 유지한다. 마치 펭귄 같은 집단서식 동물들이 붙어서 체온을 유지하는 것과 같은 원리다.


요리를 해보면(많이 안 해봤습니다만) 대부분의 요리에서 핵심은 수분과 유분의 유지와 밸런스라는 걸 알 수 있다. 고기를 구울 땐 육즙이 빠져나갈 때까지 오래 구우면 맛이 없어진다. 수분과 유분은 부드러운 식감과 고소함을 담고 있다. 그러니까 어떤 요리든 과하게 열을 가하면 질겨지고 고소한(본연의) 맛이 사라진다는 얘기다.


주꾸미나 오징어를 데칠 때도 마찬가지다. 타이밍이 중요하다. 나물을 무칠 때에도 데친 후 물기를 너무 꽉 짜면 나물의 식감이 퍽퍽해진다. 물기를 너무 안 짜면 나물에서 물이 배어 나와 간이 안 맞고 식감도 물겅물겅해진다. 과메기를 응달에 말리는 것도 촉촉함과 고소함을 주는 수분과 유분을 지키기 위함이다.


내가 B보다 A를 더 맛있게 느낀 것은 심미적 요인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 실제로 A가 더 촉촉하고 고소했던 것이다. A의 단점이라면 한 번에 다 먹기에는 양이 많기 때문에 먹고 나서 팩에 싸놓아야 한다는 것 정도다.


나는 작가니 여기서 마치면 안 된다. 범용의 원리를 이끌어내야지. ㅎㅎ 글이나 음악도 마찬가지다. 배열을 달리하면 더 맛있어진다. 그런 연구를 많이 해봐야 한다. 같은 재료를 배열만 달리 해서 더 맛있게 만들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배열(배치)도 요리의 한 부분이다.


예시를 하나 들면 과격하게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X 같은 년이 있나?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다니" 이런 문장으로 글을 시작한다면 무슨 일인가 싶어 최소한 다음 문장은 읽어볼 것이다. 나가수나 불후의 명곡을 보면 사비(절정부)부터 시작하는 편곡을 종종 볼 수 있다. 우선 내질러 놓고, 청중이 "이건 뭐지?"하고 놀라거나 당황하거나 황당해하는 사이에 질서정연하거나 안도감을 주는 퍼포먼스를 곧바로 이어갈 수 있다면 그 공연은 성공이다.


생활도 마찬가지다. 다람쥐 쳇바퀴처럼 삶이 무료해진다면 하루의 배치를 바꿔보는 것이다. 아침에 하던 운동을 저녁에 해본다든지, 책을 거꾸로 읽어보고, 규칙적인 생활 규율에 따라 당연히 자야 할 밤을 주말 하루 정도는 음악을 들으며 지새 보는 것이다. 여성들은 흔히 헤어스타일의 변화로 기분전환을 시도한다.


완독의 강박을 버리고 책 10권을 동시에 찔끔찔끔 읽어본다든지, 피사체가 반 잘린 사진만 찍어본다든지...


어, 너무 나갔나? ㅎㅎ 배열이란 게 깊이 들어가면 원자, 분자, 나노까지 가니 그럴 수 있다.




당신과 내 안의 가능성들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우리의 유분과 수분을 더 잘 유지할 수 있는 배열을 계속 시도해보자. 시행착오를 통해 맛의 절정점을 찾자. 당신과 나의 삶과 글에서 더 멋진 풍미가 전해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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