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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Nov 21. 2021

비겁한 나를 바라보는 초라한 나

우연한 기회에 이전보다 좋은 일자리로 이직을 했다. 이전 일자리는 음악 작업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단순히 파트타임이라는 이점만 보고 선택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실제 업무는 단순한 나의 예상과는 상당히 달랐다. 


우선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장소에서 야외에 노출된 채 일해야 하는 수치심이 있었다. 그다음은 육체적 고통. 발바닥과 다리가 아프고, 더위와 추위를 견뎌야 했다. 세 번째는 감정 노동. 만만한 게 OO이라고, 신분이 낮아 보이는 우리들에게 거침없는 짜증과 반말과 욕을 해대는 진상들에게 일일이 반응할 수 없고, 반응해서도 안되기에 참고 속으로 분을 삭이는 일도 만만치가 않았다.


중간중간 이직을 하려고 무던히도 용을 써봤지만 잘되지 않았다. 파트타임 일자리 자체가 많지 않은 데다가 주로 있는 학원차량 운전 기사직은 출퇴근을 하루에 두 번 해야 하고, 점심식사 제공이 안되다 보니 밥을 차려먹고 출퇴근을 두 번 하느라 허공에 날아가는 시간이 만만치 않았다.


작곡이란 걸 처음 시작할 때 필드에 계신 분이 해주신 조언이 생각났다. "음악의 길이 결코 만만치는 않을 겁니다."


아무튼 이런 연유로 이직을 일단 단념하고, 나름대로 적응을 하며 직장생활을 하던 중 우연히 채용 제의가 왔다. 풀타임 업무였지만 전에 하던 일이고, 업무 강도가 당시 일보다 현저히 낮았다. 나는 나이, 자격증 등 여러 가지로 자격이 미비해 채용될 자신이 없었는데, 결론적으로 채용이 됐다.


채용이 돼서 기쁘긴 했지만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나는 상당히 얼떨떨하고 당황했다. 너무 다른 세상이었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자리! 이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어려서부터, 젊어서부터 몸부림을 치는 거구나." 


원래 자유분방했던 나는 직장생활이 맞지 않는 옷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안정된 직장을 위한 학력, 자격증... 이런 쪽에는 남들에 비해 정말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무슨 근자감이었는지 몰라도 어떤 분야든 대단히 노력만 하면 사업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하던 가게를 접고, 평소 관심 있던 다른 분야에서 두어 번 창업해서 다 말아먹고, 최후의 보루로 생각하고 도전한 공무원 시험까지 떨어지면서, 나는 그만 무기 없이 전쟁터에 나간 병사처럼 취업시장에 내던져진 초라한 중년이 되고 말았다.


이런 와중에 작곡은 포기할 수가 없고... 이렇게 고군분투하던 와중에 좋은(?) 일자리가 얼떨결에 주어졌다. 아직 확정이 아니라서 사실 최종적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운 좋게 자리를 차지한 내가 눈치를 보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자리를 뺏길까 싶어 뭔가 불안하고, 상사의 눈치도 많이 보고. 이전의 난 안 그랬는데...


뭔가 비겁하고 비굴해진 것 같은 내가 너무 초라해 보인다. 나는 누구에게나 당당하게 큰소리칠 수 있는, 돈 없고 빽 없어도 자존심 하나는 살아있는 놈이라 믿었는데, 결국 나도 똑같은 속물이었던 것이다.


물질적인 안정, 확보된 자리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내 모습. 이 자리가 있어야 나는 좀 더 안정적으로 음악을 할 수 있고, 연로한 모친도 도울 수 있고, 빚에 허덕이는 아들도 도울 수 있고... 정당해 보이는 핑곗거리는 많다.


'이러다가 만약 최종적으로 채용 확정이 안되면 어찌 될까? 희망고문으로 끝나버리면 말이다' 이런 불안한 생각들도 잠재해 있다. 심란하다.


'이 <자리>라는 것 때문에 수많은 불의가 행해지는 세상을 뻔히 보면서도 나 역시 이 <자리>에서 한 발짝도 자유롭지 못하구나.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약해졌지? 나이 때문인가? 그래 나이를 무시할 순 없지! 그것 말고도 점점 잘난 게 없는 나를 알게 되니 자신이 없어지는 거지.'


'그래, 소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나오는 그 까라마조프 영감처럼 나 역시 태생이 비겁하고 비열한 것 같아'


비겁하고 비열한 나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럴지라도 그 와중에서도 최소한 자존심은 지켜보자. 스스로에게는 당당하고 공정할 수 있도록 사회생활의 센스와 눈치는 발휘하되, 탐욕에 눈먼 침 흘리는 개는 되지 말아야지.


백수 시절이 좋았던 것 같다.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고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으니. 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 시절엔 한편으로 마눌님의 따가운 눈초리가 있지 않았던가.


세상살이가, 인간관계가 자로 그은 선처럼 반듯할 수는 없다. 세상은 복잡하고 혼탁하지만 우리는 적응하고 살아야 한다. 내가 왜 탯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이 험한 세상에 나왔을까. 순수한 세상에 살고 싶지만 세상은 절대 순수할 수가 없다.


그래도 살아있다는 건 의미가 있다. 그렇게 믿고 싶다. 이렇게 글을 쓸 수 있고, 내 삶을 스스로 평가할 수 있으며, 단 0.1차원이라도 스스로의 삶의 차원을 높여보려고 애쓸 수 있으니 말이다.


혼탁한 세상 가운데에서도 나의 세상은 존재한다. 나이가 들수록 <나만의 세계> -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 에 대한 분별력이 생기고, 그것을 잘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은 향상된다. 그런 의미와 재미가 있어서 삶은 살아볼 만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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