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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Feb 02. 2022

아들아, 먹고 사느라 욕본다

멀리 부산에서 막내가 왔다. 빚에 눌려 있는 형편인데도 명절이라고 브랜드 한우와 천혜향인지 뭔지 하는 귤 사촌을 사 왔다. 가정이 뭔지 몰랐던 나도 나이가 들고 애들이 독립하니 1년에 겨우 몇 번 보는, 객지에 있는 아들이 애틋하다.


큰아들은 가까이 살고 번듯한 직장이 있어서 애틋함이 덜 한 걸까? 막내는 영업을 한다. 어떤 사람들은 'OO팔이'라고 비하하는 그 영업직이다. 내 아들이 영업을 해서 나는 그런 말이 가슴 아프다. 비양심적으로 영업하는 친구들 때문에 그런 비하 발언도 생겼겠지만, 맨땅에 헤딩하는 영업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하던 영업을 관두고 다른 영업직으로 옮긴단다. 속박을 싫어해서 평범한 직장생활은 적응을 못하는 막내. '잘 해내야 할 텐데. 조급하게 욕심부리면 안 되는데' 노파심에 이런저런 생각이 든다. 이번에 와서 하는 얘기를 들어보니 음악을 상당히 좋아하는 게 나를 많이 닮았다. 이 정도로 관심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음악 오디션 프로는 빼놓지 않고 다 찾아본다니.


노래 이야기가 나온 김에 몇 년 만에 노래방에 가기로 했다. 노래 부르는 옆모습을 보니 여전히 애 티가 난다. 사는 게, 먹고사는 게 녹록지 않음을 알기에 그 얼굴이 애잔하다. 객지라 어릴 적 친구도 거의 없을 테고, 빚 때문에 마음도 갑갑할 테고.


극장에도 갔다. 아내도 나도 나이가 들어서일까? 정신없이 휘황찬란한 CG의 향연에 되려 머리만 아프다. 그래도 다리를 펼 수 있는 좌석에 그 짱딸막한 다리를 쭉 뻗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귀엽다. 어쩌다 나를 만나 호강은 못해보고 고생이 많네.


엄마한테도 다녀왔다. 계약직이라도 아들이 안정된 직장에 들어갔다고 너무너무 좋아하신다. "나이가 들수록 돈이 있어야 된다"는 말씀에 <돈 벌기>에서 살짝 비켜난 삶을 살고 있는 나는 유구무언이다.


내가 슈퍼아버지, 슈퍼아들, 슈퍼남편이 돼서 아들과 엄마와 아내의 고통을 모두 덜어드리면 좋으련만 그럴 능력이 없다. 안타깝지만 팩트고 현실이다. 젊었을 때는 내 힘으로 단기간에 이걸 극복하고 부자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솔직히 지금은 그런 생각을 접었다. 돈을 좇다간 돈도, 하고 싶은 일도 모두 놓치는 인생이 될까 봐 몇 년 전부터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어릴 때, 젊을 때 나는 참 강하다고 생각했다. 결손가정에서 자랐어도, 들판의 잡초처럼 강하다고 생각했다. 살아보니 강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강한 척할 뿐. 신이 아닌 이상,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데 어떻게 강할 수 있나. 못되고 악랄한 사람은 있어도 강한 사람은 없다. 못되고 악한 것도 약함이 잘못 변질된 형태일 뿐이다.


엄마도, 아들도, 아내도 참 먹고 사느라 욕본다. - 수고한다, 고생한다란 뜻으로 경상도에서 자주 쓰는 말 - 돈으로 그들의 수고를 덜어줄 순 없지만 그래도 굳건한 마음으로 내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지. 필요할 때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도록.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것, 아들이 있다는 것, 남편이 있다는 것이 그래도 조금은 힘이 될 테니까.


또 살다 보면 내가 대기만성형이라 뒤늦게 잘될지, 인생은 모르는 거니까. 그래도 엄마는 아들 온다고 불편한 손으로 요리도 하시고, 회와 족발도 사놓으셨다. 올해 추석에는 내가 회를 사 가야겠다. 아들이 사 온 한우 등심을 아내가 맛있게 먹어서 기분이 좋다. 정말이지 엉망인 우리집을 아들이 온다고 둘이서 치워서 조금은 깨끗해졌다. 이것도 기분이 좋다. 




사실 나도 타고난 본성은 회사에 너무너무 가기 싫다. 음악에만 집중해서 뭔가 결실을 맺고 싶다. 그래도 가족들이 자신들의 삶을 견디듯 나도 그런 마음으로 내일 또 출근을 할 것이다. 현재의 내 삶이 비록 가족만을 위해 희생하는 삶은 아니지만, 결국 우리는 더 화목하고 추억을 쌓는 그런 가족이 될 것이다.


때로는 이기적이고, 때로는 칼끝처럼 불안하기도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할 수 있는 사람들을 지지하고 응원하며 하루하루의 삶을 지탱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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