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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Feb 10. 2022

자리를 마련하고 이벤트를 발생시키자

공짜 행복을 얻는 법

막내가 최근 직장을 옮긴 후 카톡 답변도 빨라지고, 먼저 연락이 오기도 한다. 아마 이전 직장에서는 영업직의 특성상 전화에 시달리다 보니,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자체가 싫었나 보다. 약간 마음의 여유가 생긴 징표인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어제는 웬일인지 건강에 이상이 없냐고 안부를 물어보더니, 장이 안 좋다 하니 유산균을 선물로 보내준다.


나는 주변에서 흔히 보는 존경할만한 아버지상으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자식들에게 선물을 받을 때마다 좀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더군다나 현재까지도 내 부모에게 효자라 할 수 없기에 더 그렇다.


동서, 친구, 홍보기자단 회장님, 직장 상사... 주위에만 해도 자식에게 헌신적인 아버지가 넘친다. 물론 형을 뒷바라지한 어머니, 내 아내도 헌신적인 엄마다.


가정을 구속으로, 자식을 짐으로 여기는 마음이 젊은 시절 꽤 있었다. 자유분방한 성격 탓도 있고, 때 이르고 계획에 없던 결혼생활도 원인이었던 것 같다.


막내는 낚시를 좋아해서 함께 낚시를 다니느라 그나마 유대가 많았지만, 큰애랑은 큰애가 중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급속도로 줄어들었다.


막내는 속마음이 어떻든 겉으로 대드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대하기가 편했지만, 큰애는 나를 닮아 따박따박 따지기 좋아하고, 말로도 절대로 지는 법이 없어, 자식이지만 대하기가 만만치 않고 불편했다.


거기다가 나는 콩가루 집안에서 무너지지 않고 홀로 살아왔다는 자의식이 너무  강해서 아이들에게도 독립심, 강함만강조했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지원 끝'이라는 말을 수시로 했고, 강한 자로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를 강요했다.


물론 이런 교육이 결과적으로 장점도 있었겠지만, 자식이 독립하기 위해 태어난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딱딱하게 굴었는지 후회가 된다. 큰애는 국립대에 자력으로 합격했지만 - 학원의 도움 없이 -, 나는 성적에 맞춰 원치 않는 과에 간 것이 고등학생 때 게임에 빠져 공부를 게을리한 이라며 질책을 했다. 큰애와 갈등이 극에 달했을 때, "아빠는 한 번도 나를 칭찬해준 적이 없잖아요"라는 큰애의 한마디가 모든 걸 함축하고 있다.


헌신적이지도 않으면서 권위적이며, 사랑도 듬뿍 주지 못한 아버지. 이것이 부모로서의 내 모습이었다. 내 아버지에게는 원망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어머니와는 같이 산 세월이 몇 년 안 돼서 잔정이 없는 나. 이것이 자식으로서의 내 모습이다.


이런 나이기에 명절이라고, 생일이라고 자식들에게 선물이나 용돈을 받는 게 부끄럽다.


자식들은 장성해서 독립했고, 그들의 어린 시절은 지나가 버렸다. 추억을 쌓고 사랑을 나눌 아이들은 없어져 버렸다. 하지만 사람은 죽을 때까지 아이라 하지 않던가. 자식들도 아이고, 나도 아이다.


지금이라도 자리를 마련하고, 이벤트를 발생시켜서 자식들과 함께 할 시간을 만들면 된다. 다행히도 아이들이 나에게 마음을 닫고 있는 게 아니라서 기회가 있다.


이벤트를 발생시킨다는 건 프로그래밍 용어이기도 한데, 함수에 어떤 값을 대입시켜서 결괏값을 얻어내는 걸 말한다. 즉 나는 좋은 결괏값을 예상하고 삶에서 여러 이벤트를 발생시킬 능력이 있는 것이다.


식사 자리를 마련하거나, 아들이 사는 집에 먹을 걸 챙겨서 가끔 찾아가거나, 펜션을 잡아서 가족모임을 계획하거나, 카톡 치킨 선물을 쏠 수도 있다. 이런 이벤트를 발생시키지 않아도 세월은 아무 일 없는 듯 흘러가겠지만, 이런 시간은 침묵의 어리석은 시간이 아닐까. 내가 나이 들어 치매라도 걸리면 이런 시도조차 못해볼 테니 말이다.


올가을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 즈음에 근사한 가족사진을 찍을 계획이다. 우리 부부가 더 늙기 전에, 아이들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말이다.


공저 멤버들, 멘토 작곡가, 가수협회 회장 형님, 기획사 매니저... 음악과 글 안에서의 인연들도 내가 자리를 마련하고, 이벤트를 발생시켜서 맺어진 인연들이다.


소속감, 인연으로 인한 행복은 공짜다. 이런 인연을 맺기 위해 계약금, 중도금을 치르지 않아도 된다. 다만 감나무에 열린 감을 그저 먹기 위해서는 적어도 일어서서 따는 수고는 해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아이들에게 덜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는 일. 친근한 감정적 유대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일. 최고로 잘할 순 없어도 최악이 아니게 조금씩 나아질 순 있다.


이번 설에 어머니와 우연히 춤 이야기를 나눴는데, 어머니가 의외로 춤에 관심이 많으신 걸 알고 무척 놀랐다. 새댁 시절에 이웃 친구 3명과 춤을 배우러 몇 달 다니셨다고 한다. 그러면서 스텝을 밟아보신다. 그런 행복한 새댁 시절이 길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머니, 나, 아내, 아이들 모두가 아이다. 동심이 있으니까. 사소한 걸로 삐치기도 하고, 행복할 준비가 돼 있으니까.


나는 세월을, 일상을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지 않고, 자꾸 자리를 마련하고, 이벤트를 발생시키려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 좋은 인연들을 위해. 그래야 그나마 나이 들어 후회를 덜 할 것이다.


내가 죽고 나서 아이들이 추억할 컷(장면)이 적어도 10컷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딱딱한 '아버지'란 글자만 남지 않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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