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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Nov 01. 2022

기차여행과 부전시장

영업이 안된다고 기가 죽어있는 막내아들을 보러 아내와 부산행 기차에 올랐다. 우리 부부의 올해 마지막 여행은 저 지난주 군산 여행이었으나, 다시 일을 시작하기 전 아들을 한번 봐야겠다는 아내 때문에 수십 년 만에 타보는 기차다. 역마다 다 서는 완행인 무궁화호는 생각보다 낭만적이지 않았다. 객실에 기름내가 많이 나고 조명이 침침해서, 우울하고 우중충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철도청은 국가에서 운영해서 그런지 예산이 부족한지, 객차나 역의 실내외 디자인이 너무 고리타분하고 생기가 없었다. 기차를 탄 승객들도 그다지 활기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창밖 풍경도 이렇다 하게 볼거리가 없다. 논밭 아니면 공장 아니면 도로. 그래도 기차는 돌파구가 안 보이는 현실을 꾸역꾸역 살아가는 인간 군상처럼 그 침침한 조명 아래에서도 아주 성실하게 역들을 통과했다.


우리는 종점인 부전역에 내렸다. 역과 붙어 있는 부전시장은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내가 사는 진주의 중앙시장에 비해서 말이다. 온갖 먹거리들이 다 있고, 많고, 저렴한 곳. 대구탕이 8000원, 칼국수가 3000원, 김밥이 2000원으로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그야말로 나 같은 서민을 위한 곳이었다. 우리 부부는 첫째 날엔 커다란 뚝배기의 대구탕을, 둘째 날엔 진한 멸치육수의 칼국수를 아주 흡족하게 먹었다. 막내아들도 역시 맛있게 잘 먹더라. "일이 안 풀린다고 기죽어 있지 말고, 돈 없으면 여기 와서 뜨끈한 칼국수나 순두부 뚝배기 같은 거 사 먹고, 부산시민공원 한 바퀴 산책해" 아들에게 일렀다. 먹는 것과 걷는 것. 우울을 극복하기에 아주 기초적인 행동이다. 이건 또 동시에 나 자신에게 하는 말.


점심을 먹고, 서면 교보문고에 가서 투고할 목적으로 출판사 조사를 하다 보니 벌써 해질 때가 됐다. 체력이 고갈돼 그만 돌아다니고 호텔에 일찍 체크인하기로 했다. 침대 2개가 방을 가득 채우고 히터로 난방을 하는 호텔은 역시 내 체질에 안 맞다. 온돌방과 싱크대가 있는 휴양림 방이 좋다.


아들은 저녁때가 돼서야 겨우 연락이 닿았다. 함께 송정에 가서 고기를 먹고 산책을 했다. 아들은 힘들면 가끔 새벽에 이곳 바닷가에 온다고 한다. 젊을 땐 파도가 넘실대는 역동적인 바다가 좋았는데, 이젠 잔잔한 서해바다가 더 끌린다. 나도 이제 저물어가는 인생이라 그럴까. 한집 건너 있는 커피숍과 여기저기 버려진 테이크아웃 컵들이 피로도를 상승시킨다.


호텔로 돌아와 맥주 한 캔을 놓고 아들과 대화의 시간. 아들은 속마음을 웬만해선 잘 말하지 않으므로 거의 혼자 떠들어댔다. 상황이 어려워도 기가 죽으면 안 된다. 살아내야 하고, 살아진다는 이야기. 아들은 동기부여 강사 같은 걸 하고 싶은 모양이다. 나는 영업으로 완전히 성공한 후로 그 때를 미루지 말고, 지금부터 글도 써보고 유튜브도 찍어보라 했다. 그 속에서 도움받는 사람들의 피드백이 다시 너에게 힘을 줄 거라고.


다음날 헤어지기 전, 부전시장 내 식당에서 잘 먹는 아들 모습을 보니 우울증에 걸린 것 같진 않다. 일시적인 낙심 정도이기를. 더 힘을 내기를.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는 무례하게 떠드는 사람들 때문에 기차 호감도가 더 떨어졌다. 운전을 안 해서 피로가 덜 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안 피곤한 것도 아니다. 객실이 프라이빗한 공간이 아니라 정신적 피로도가 올라간 걸까.


집에 돌아와서 부전시장의 싼 물가를 이용해 장사를 할 수 없을까 하고 아내와 이야기하다 다투고 말았다. 남의 종살이(직장생활) 그만하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그 대안(사업 아이디어)이 전혀 없는 아내에게 한심하다고 말한 게 화근이었다. 아내는 판매와 접객에 상당한 소질이 있어서 이걸 자영업을 통해 둘이서 잘 살려보고 싶은데, 좀처럼 답이 나오지 않아 답답해서 한 말이었다. 아들 잘 보고 와서 이게 무슨 상황인지. 역시 말은 조심해야 하고 비난은 삼가야 하는데.


그래도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투잡을 뛰어야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건  발전이다. 음악을 이유로, 힘든 일은 그만하고 싶어서, 늘 제외해 두었던 옵션이었으니까.


올해 4월부터 여행도 다닐 만큼 다녔고, 주말 저녁에만 일한다면 음악을 위해 할애하는 시간을 완전히 접지 않아도 될 것 같다. 형편에 맞게 살아야 하고, 저지른 일은 책임을 져야 한다. 세상과 타인에게 도움이 되기 전에 먼저 가족에게 도움 되는 남편이 되는 게 순리. 이 미션도 결코 쉽지 않다.

 

체면과 나약함을 버리고 나를 내려놓으면 못할 게 무엇이랴. 삶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나는 아직 깨달아야 할 것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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