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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Jul 25. 2023

내 몫의 고통과 수고


'고생 끝에 낙이 온다'라는 속담이 있다. 낙을 바라고 참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사실 고생, 수고, 고통은 삶이 끝날 때까지 계속 온다. 반복된다. 그래서 미래의 낙을 바라는 방법만 가지고는 현실을 부정하거나 힘든 인내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그 자체를 인정하는 게 현명한 방법인 것 같다. 50 평생을 살아보니 그렇다. 고통과 수고는 신이 삶에 심어놓은 나무다.


재수 시절에 수고를 극단적으로 회피하고 쾌락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테스트를 해 보았다. 씻고, 밥 차려 먹는 게 귀찮으니 3~4일간 밤을 새워가며 영화만 본 적이 있다. 물론 대충 끼니를 때웠다. 그 시간이 과연 행복했을까? 행복했던 기억이 없다. 웃긴 건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서,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선 보는 영화에도 역시 현실의 문제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넷플릭스가 없던 그 시절에는 영화를 집에서 보기 위해서는 비디오 대여점에 가는 수고, 취향에 맞는 영화를 고르는 수고, 대여료를 마련하기 위한 (부모의 돈을 뜯어내든, 알바를 하든) 노동의 수고, 연체료를 물지 않기 위해 반납일을 기억하는 수고, 다시 돌려주는 수고를 기본적으로 해야 한다. 이러한 수고를 마친 후에도 영화 감상 중 찾아오는 배고픔과 배설의 욕구, 침침해지는 눈, 찌뿌둥해지는 몸, 안 씻어서 기름기에 떡지고 가려운 머리에도 대응해야 한다. 즉 하나의 쾌락 행위에도 온갖 수고가 포함되어 있다. 순수한 쾌락은... 지구상에는 없다.


즐거운, 즐겁기 위한 여행을 가더라도 숙소를 잘 선택해야 하고 (똥매너 주인들이 가끔 있다), 예약해야 하고, 체크아웃 시간을 지켜야 하고, 밥을 사 먹을 것인지 해먹을 것인지에 따라 식재료를 장 보든, 맛집을 고르든 해야 한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출발시간에 맞게 역에 도착해야 하고, 자가용을 이용하려면 연료가 충분한지 체크해야 하고, 초행길이라면 네비를 잘 봐야 하고, 안전운전해야 한다. 즉 일을 하든 놀든 수고는 늘 따라다닌다.


돈벌이에 수고와 고통이 따라다님은 말해 무엇하랴. 자본주의의 특성상 업무가 세분화되어 있기 때문에 자영업자든, 직장인이든 대부분 1 대 다의 상황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한다. 상대방은 나와 상대할 때 1 대 1이기 때문에 당연한 듯 요구와 요청을 한다. 하지만 나는 반복되는 1대 1의 상황에서 지쳐간다. 그래서 자본주의 하에서 식당 사장이 손님에게 정성을 다하기란 정말정말정말 쉽지 않다. 이미 주인장의 영혼이 지쳤는데 정성은 무슨... 그냥 평타를 치면 다행이다. 정성을 다하다가도 성공해서 규모가 커지면 외형이 번지르해지는 대신에 가격이 오르고 맛은 평범해지고, 홀은 정신 없어진다.


그러나 수고와 고통을 삶은 정돈해 주는 역할을 한다. 쓴맛의 음식이 입맛을 정돈해 주는 것처럼. 라이더를 하는 내 모습이 초라하긴 하지만 일을 하고 나면 육체도 마음도 조금 겸손해진다. 내 입에 들어가는 것을 위해 내 몸을 움직여 일해야 한다는 사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것(콘텐츠)을 인정해 주기 전까지는 어떤 형태로든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사실이 나를 겸손하게 한다.


피아노 관련 유튜브 채널에서 피아노 연습의 고통에 대한 영상을 봤다. 전공자들은 어릴 때부터 자의로 연습을 한 경우가 많이 없어서 연습 자체(연습 이후의 완벽한 연주나 공연이 아닌)에서 기쁨을 누리는가에 대해 요즘 고민이 많다고 했다. 악기는 평생 연습해야 하기 때문이다. 악기를 제대로 연주하려면 이건 프로나 아마추어나 마찬가지다.


자의로 피아노를 배우고 있는 나도 역시 연습의 고통이 있다. 실력으로 비교하면 그들에 비해 매우 초라한 수준이지만, 고통은 비슷하다. 아마추어의 연습은 자본주의에서 매우 비생산적인 활동이다. 돈이 안되는, 돈을 못 버는 활동이다. 그럼에도 하루에 2시간 정도 꼬박 투자한다. 100% 음악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나는 나름대로 안정된 직장을 버리고, 스카웃 제의도 거절하고 라이더를 하며 음악에 시간을 투자하고 있다.


돈이 될지는 모른다. 솔직히. 그래도 나는 나름 자부심을 느낀다. 무엇을 하든, 무슨 쾌락을 추구하든 고통과 수고가 따라오는 것이라면 이왕이면 내가 정신적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일로 고통과 수고를 느끼는 게 낫다. 무의미한 일로 그것을 느끼고 감당하는 것보다는 백 배 낫지 않은가.


삶이 노매드라면 결국 남는 것은 체험이다. 체험은 곧 기억이 된다. 이미 호의호식하긴 글렀다.(아니 아직 그르진 않았다고 믿고 싶다. ㅎㅎ) 그래서 나는 더욱 체험을 소중히 여긴다. 체험에는 고통과 수고가 당연히 포함된다. 기본 옵션이다. 선택권이 없다. 살아 있으려면 그래야 한다.


그래도 우린 고통과 수고를 겪어 봤기 때문에 배려를 배운다. 6개월 라이더 일 중 처음으로 치킨을 먹고 가라고 대접한 치킨집(가맹점) 사장님. 그런 배려는 감동을 준다. 자기 집 음식만 빨리 배달해 달라고, 빨리 픽업하라고 재촉만 하는 집에는 웬만하면 안 가게 된다. 아주 심한 경우가 아니고는 기사에게 일절 말(잔소리)를 하지 않고 대신 픽업 시에 늘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인사하는 사장님에게는 그 깊은 인내와 배려 - 인성 - 를 배운다.


결국 고통과 수고는 삶의 친구다. 그랬다. 그걸 몰라서 친구를 피하려고 무던히도 애썼던 세월들. 지구를 벗어날 수 없고, 쏟아붓는 피를 막을 수 없고, 하늘 아래에 살고,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우리들은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자각을 매일 해야 한다.




수고 속에서 은근하고 은밀한 기쁨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고통과 수고, 쾌락과 즐거움은 어쩌면 종이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있는 아주 가까운 사이인지도 모른다. 방을 치우되, 먼지를 인정하고, 그렇다고 지나친 먼지를 방치하지는 말고. 수고와 함께 하루하루를 즐겁게 사는 것, 즐겁게 살되 수고를 마다 않는 것. 이렇게 살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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