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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Aug 21. 2023

재능없음의 자연(자기)치유력


'앞으로 3개월 남았습니다.' 의사의 진단을, 말을 믿는 순간 육체의 암은 정신적 암이 된다. 정신이 그 말에 압도되어 생존에 대한 희망을 놓아버린다. 반대로 의사의 진단과 말을 거부하고, 믿지 않고 자연으로 들어가 자기만의 치유법으로 생존한 암환자도 많다. 나의 외삼촌도 의사의 시한부 선고와 달리 20년 넘게 잘 살아계신다.


현대 사회에 사는 우리는 반복되는 매스컴의 메시지에 나도 모르게 쇠뇌당한다. 그것을 믿는다는 의식 없이 은연중에 믿어버린다.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게 되고, 믿어야 할 것을 불신하게 된다.


멋진 차를 모는 훈남훈녀(자동차 광고)를 보면 차 할부금을 내야 하는 3년 이상의 고통보다는 멋진 차와 함께 자신도 멋있어진다는 믿음(착각)을 가진다. 실제로는 3년간의 빚갚음이 훨씬 더 고통스러운데도 멋진 차를 소유한다는 우쭐함이 훨씬 더 크게 다가온다. 왠지 그래야 더 교양있는 사람이 될 것 같다. 자본주의에서 괄목한 만한 성과를 낸 누군가가 매스컴에 소개되면 그 사람을 지나치게 우상화하거나 나의 재능없음에 대한 확신에 쇄기를 박아버린다. '그는 그라서 그렇게 되었지. 나는 안 돼' 라거나 '나도 그 사람처럼 되고야 말 테야. 내 인생을 걸겠어' 하는 식이다.


보이는 것들은 권위를 가진다. 의사(= 좋은 머리 = 고학력), 현대의학, 과학(우주에도 갔다 올 정도니 대단하지 않은가) 등. 반면 보이지 않는 것들은 훨씬 더 광범위하고, 그 깊이를 알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측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권위가 없다. 의사와 병원의 도움 없이 암이 나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객관적으로 보증할 수 없는 민간요법에 불과한 것이다.


어떤 선생이 학생의 기분과 심리와 환경까지 고려해서 지도하는가? 피아노나 기타를 칠 때 학생의 새끼손가락이 뻣뻣한 것이 그 학생의 성격이나 가정환경과 영향이 있는지를 세심하게 살필 수 있나? 아니면 오늘의 기분과 연관이 있나? 혹시 어젯밤 잠을 설쳤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단지 체르니를 칠 수 있으면 성공이고 못 치면 실패다. F코드를 잘 짚으면 성공이고, 매끄럽지 못한 소리가 나면 실패다.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자는 기능공이 아닌데 말이다.


'나는 음악에, 미술에, 돈버는 데 소질이 없어!!!'


처형은 자기도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서 학원에 두어 달 다녔지만 잘 되지 않았고, 피아노 학원 원장도 '예체능은 어느 정도 재능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로써 처형은 자기가 피아노를 더 이상 배우지 않는, 그만둔 이유에 대한 합리화를 했다. 본인도 재능이 없음을 느꼈고, 전문가도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하지만 만약 교육 대상이 50대의 중년 부인이 아니라 자기의 딸이었다면, 심지어 부모가 음악가로 키워보고자 하는 야망을 가졌다면 그 원장이 그렇게 쉽게 '재능이 있어야 한다(당신은 재능이 없는 것 같아)'는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더 느린 속도로 연습해 보게 하거나, 피아노 교재를 쉬운 걸로 바꾸거나, 더 유능하고 친절한 선생을 소개해 주지 않았을까? 피아노에 대한 동기 부여를 위해 연주회에 데려갔을 수도 있고, 훌륭한 음악 영화를 함께 감상했을 수도 있다. 방법은 수없이 있다.


이렇듯 확실하지 않은 영역에 대해 단정을 짓는 것은 일종의 억압이다. 수많은 유대인이 억압받고 학살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상상해 보라. 당신이 스스로 어떤 정당한 생각이나 재능을 아우슈비츠의 유대인처럼 억압하고 심지어 학살한다? 비유가 과한 것 같지만 사실, 정말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고 초등, 중학교 때는 꽤 두툼하게 글짓기 상도 받았다. 어른이 돼서는 기자 생활도 해봤다. 지금은 브런치에서 열심히 글을 쓰고 있지만, 구독자 100명을 넘기지 못하고 있다. 글 발행수는 상당하다. 그러면 나는 글쓰기에 재능이 없는 걸까?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지 못하니까 구독자가 늘지 않는 것 아닐까. 브런치라는 플랫폼이 없었다면, 인터넷이, SNS가 없었다면 나는 스스로 '글 좀 쓴다'라고 생각하며 제 멋에 계속 글을 썼을 것 같다. 광활한 인터넷 덕분에, 수많은 재능자 덕분에 나는 겸손해졌지만, 또한 스스로 초라해하고 위축된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 비교라는 것은 우열을 가리게 만들고,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순수한 마음을 억압한다. 잘 한다는 것의 기준이 정해진다. 이미 잘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 그 사람처럼 하면 잘하는 것이다. 이러한 외형적인 잘함에 포커스를 맞추면 우리 속에 잠재된 순수한 세포, 충분한 가능성이 있는, 충분히 내 방식대로 잘할 수 있는 그 세포들이 죽는다. 이미 뇌에서 내려 버린 사형 선고에 생존을 포기해 버리기 때문이다. 누가? 그 세포들이.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연습해 나가다가 드디어 어려운 부분에 봉착했다. 왼손 엄지와 약지로 옥타브 음들을 동시에 눌렀다가, 다시 엄지를 눌렀던 그 위치를 약지로 눌러야 하는 부분이다. 그것도 16분 음표다. 검은 건반을, 그것도 새끼손가락으로 한 옥타브 점프해서 누르려고 하니 잘되지 않는다. '검은 건반은 면적이 왜 이리 좁지? ㅎㅎ' 자연히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면서 더 안 된다. 며칠째 씨름한다. 'Smoke On The Water'를 연습하던 기타 시절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걸까? 망할 놈의 새끼손가락.


하지만 이제 이전처럼 분노하지 않는다. 나는 당연히 연습한 것이 금방 되어야 하는 천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분할 수 있다. 메트로놈 속도를 40으로 늦추고 해본다. <고양이누나> 유튜브 채널의 영상을 0.5배속으로 해서 자세히 본다. 손가락이 자연스럽게 쭉 펴져 있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면 나도 모르게 굽어진다. 하지만 편안하게 힘을 빼면 손가락이 펴진다. 그 상태에서 어루만지듯 건반을 쓰다듬는다. 그렇게 흉내를 내본다. '어럽쇼! 이게 된다.'


적어도 자신이 순수하게 좋아하는 영역에 있어서만큼은 세상의 여러 오염된 메시지, 그 잘못된 믿음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방군은 누군가? 바로 나 자신이다. 오염되고, 왜곡되고, 교묘한 상술과 술책이 뒤범벅된 세상의 메시지로부터 나의 순수한 재능과 애정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내가 글쓰기를 좋아한다면 키보드를 두드리는 작은 쾌감으로, 종이에 펜이 지나가는 소리를 즐기며, 생각과 삶이 정리되는 효능을 만끽하며 그렇게 쓰는 것이다. 물론 소수의 찐구독자와 소통하는 기쁨도 빼놓을 수 없다.


내가 음악을 좋아해서 계속 피아노를 쳐대고, 코드를 고민하고, 제멋대로 작곡을 해대면 60, 70, 80 할배가 될 때까지 나는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까? 전인적 음악인이 되고 싶다. 곡도 쓰고, 노래도 하고, 연주도 하는... 내 기준에서 잘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내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을지는 신비의 영역이다. 의사랍시고 3개월 시한부 선언하듯, 어떤 음악 전문가가 심판을 내리거나 단정을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이곳이 바로 재능이라는 신비의 영역이고, 아무도 판단하거나 결론지을 수 없는 나의 우주다. 재능이라는 세포들이 살아있는 유일한 나만의 우주.


재능없음 - 재능없다라는 믿음 - 은 암과 같다. 이 암을 눈에 보이는 권위자들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서도 안된다. "당신은 재능이 없네요. 당신은 이미 늦었어요. 당신은 나이가 너무 많아요. 당신은 고음이 안 올라가네요. 당신은 목소리가 탁하네요. 당신은 손가락이 이미 굳었어요..."


재능없음(암)의 자기 치유력을 믿어야 한다. 재능없음이 재능있음으로 바뀔 수 있다는 믿음. 그 능력이 내 안에 있다는 믿음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나이가 아주 많이 들면, 음악이 공부에서 즐김의 대상으로 더 많이 바뀌게 되면 그림도 좀 배워볼 생각이다. 그림이야말로 내가 재능이 없다고 확신에 확신을 거듭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나 자신이 바로 재능에 대한 실험실이다.




허먼 멜빌의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는 유행처럼 자주 나오는 바틀비의 대사가 있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소설 막바지에 바틀비는 결국 안 먹는 편을 택해서 결론적으로 살지 않는 편을 택했다.


"재능이 없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그러면 결국 재능없는 삶으로 끝나지 않을까? 음악에 재능있는 내가 음악적인 무언가를 계속 해대서 전인적 음악가가 된다. 강가에서 버스킹도 하고, 요양원에 공연도 가고, 재밌거나 애잔한 노래도 쓰고... 그런 충만한 삶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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