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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새 Jan 03. 2021

살림남이 되기로 했습니다

남자가 큰 일을 해야지. 살림은 무슨...

우리 집은 정리정돈이 안돼 있다.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정도는 아니지만 그 절반 정도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원인을 언제나 아내에게 돌리고 아내를 원망했었다. 나는 총각 때 무척 깔끔을 떠는 스타일이었고, 아내는 몸이 약한 데다가 정리정돈을 잘 못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싸울 때 서로를 공격하는 각각의 무기는 "이렇게 지저분한 집에 20년 넘게 산 내가 부처다", "여태껏 돈 못 벌어 오는, 경제적 능력 없는 남자랑 사는 내가 보살이다"류의 말들이었다.


공무원 시험공부할 때 '공부에만 몰입해야 한다'는 논리로 세차를 안 했는데, 여태껏 지저분한 채로 타고 있다. 트렁크에는 컴퓨터 가게 폐업하면서 남은 부품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버리기에는 아깝고, 쓸 일은 당장 없는 부품들. 엊그제 지저분한 내 차를 보면서 문득 스친 생각. '아내의 영향력이 전혀 안 미치는 차가 이렇게 지저분하다면 집안의 정리정돈과 청결 문제를 아내 탓으로만 돌리는 건 비겁한 변명이구나'


청소 - 뿐 만 아니라 생활 유지를 위해 필요한 사소한 일상들 - 를 안 하는 내 논리는 단순했다. 몰빵이었다. 한 가지에 집중해야 할 때는 그것에만 몰입해도 성과가 나올까 말까인데,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없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삶은 언제나 몰입을 해야만 하는 순간의 연속이었다. 가게를 운영할 때는 먹고사는 수준밖에 안 되는 가게 말고, 다른 대박 아이템을 찾느라 늘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 때는 늦은 나이에 젊은이들과 겨뤄 이기려면 밥 먹고 똥 싸는 시간 외에는 공부에만 전념해야 한다고, 지금은 '한 곡이라도 팔려면 작곡만 하기에도 시간이 너무너무 부족하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공무원 시험에 떨어졌듯이, 그런다고 운이 꼭 내 편이 되란 법은 없다. 아등바등한다고 열매가 빨리 맺히는 것은 아니다. 공무원 시험 준비기간 2년이 그랬듯이 모든 시간이 다 인생의 한 순간이고 과정이다. 어떤 최종 결과를 위해 담보로 잡히는 시간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아이들이 모두 독립을 해서 이제 집은 아내와 나만의 공간이 되었다. 일터에서 지친 몸을 쉬게 해 주고, 같이 잡담이라도 하면서 차 한잔 할 수 있는 장소다. 이런 소중한 공간을 그동안 너무 소홀히 여기고, 방치했다는 생각이 든다. 치우기를 미루고 '언젠가 치워야지'하고 바라볼 때마다 생기는 스트레스 비용도 만만치 않다. 지저분한 공간을 바라볼 때마다 하루에 10분간 스트레스를 받고, 그걸 돈으로 환산하면 1만 원이라고 가정해보자. 한 달간 치우지 않으면 나는 30만 원의 손실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반대로 깨끗하고 아늑한 공간에서 하루에 10분씩 행복하다면 나는 월 30만 원의 이득을 얻는 셈이다.


'남자는 살림보다 더 큰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생각했던 큰 일이란 무엇일까? 돈을 많이 벌고, 유명한 음악가가 되고, 사회적 명성을 얻는 것이 큰 일일까? 이것이 오늘 아내와 나의 아늑한 시간과 공간을 포기할 만큼 대단한 것일까? 나이가 들수록 친구가 줄어든다. 현재 2~3일에 한 번씩 연락하는 친구는 한 명뿐이다. 결국 남는 건 아내뿐이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어, 오늘 내 기분이 어땠어"하고 말할 수 있는 친구 말이다. 젊었을 때는 '애들 다 키우고 나면 훨훨 날아가리라. 독립하리라' 생각했다. 지금은? 웃픈 현실이지만 일단 갈 곳도 없고, 돈도 없다. 하하하. 그리고 지금껏 지은 죄가 많아 아내와 알콩달콩 재미나게 살아보기 전에는 양심상 독립(?)을 못할 것 같다.


날마다 30분씩만 청소를 하기로 어제 아내와 약속을 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둘 다 하면 된다. 아니, 사실 내가 좀 더 많이 할 각오를 하고 있다. 정리는 내가 잘하니까. 내가 꼼꼼하니까. 아내가 지금껏 나와 살아준 은덕에 비하면 이 정도는 내가 해도 된다. 충분히 그렇다.


오늘 거실 일부를 정리하고 나니 거실이 훨씬 넓어졌다. 사실 나는 요리도 좀 한다. 늘그막에 둘이서 요리해먹는 재미도 있어야지. 공간을 소중히 여겨서 가정이 화목해지면 아내나 나나 밖에서도 좋은 에너지를 발산할 것이다.




다음번에 쓸 글 제목 '내가 싼 똥은 내가 치운다'란 격언(?)처럼 조금씩이라도 매일매일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살림남이 되기로 했다. 최수종, 정종철까지는 못 미치더라도 말이다. 작곡하는 살림남?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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