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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 bam Dec 31. 2023

[런던, 07] 과거 발자취를 따라 걷다

The Regent’s Park

런던의 크리스마스는 버스, 지하철, 기차 그리고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는다. 차가 없다면 사실상 모든 곳을 도보로 가야만 한다. 크리스마스 당일, 나는 아무 계획이 없었다. 하지만 이른 아침 마치 정해진 것처럼 옷을 주섬주섬 입고 리젠트 공원으로 향해 걸었다. 그곳은 나의 휴식터이자 공부했던 학교가 있는 곳이었다.


The Regent’s Park

시간은 참 신비롭다. 그렇게 익숙했던 공간을 다시금 마주하는 순간이면 "아! 이곳에 다리가 있었지", "맞아, 이곳에 이 큰 나무가 있었어"라며 뇌 속 어딘가 사라져 가던 기억의 편린이 다시 떠오른다. 그렇게 난 나의 낡은 발자취를 하나씩 담으며 오랜 시간 공원을 걸었다.

 


혼자 걸었던, 혹은 누군가와 걸었던 그 길에는 이제 내리는 비와 나만 있을 뿐이다. 나와의 기억을 잊었다 하더라도 그건 사실 중요치 않다. 기억은 원래 일방적인 것이니.


학교 정문

학교를 들어갈 수 있을 거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역시나 굳게 닫혀 있었다. 그래도 담을 넘어볼까 한번 고민해보긴 했다. 하지만 내게 이젠 10대 시절의 무모함은 사라진 지 오래다.





영국에서 지내던 2016년 이후 꽤나 여러 번 이곳을 다시 방문했지만, 유독 올해 런던의 겨울은 왜 이토록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강한 바람과 내리는 비를 마다하지 않고 맞는 난 그대로이다. 허나 내게 주어진 아주 작은 기억의 짐은 온전히 나에게 있기에 런던의 비는 아주 조금 더 찰뿐이다.


<Come Rain Or Come Shine>Ray Charles, Frank Sinatra, Ella Fitzgerald, Norah Jones 등 내가 좋아하는 수많은 아티스트가 불렀지만, 런던의 비를 맞고 있는 나에겐 비극적 결말을 담는듯한 서사를 풍기는 Chet Baker 버전을 듣지 않을 수 없었다.


I'm with you rain or shine

Photo by B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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