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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 bam Aug 15. 2023

한국 기독교는 철학을 대립적 구도로 가르친다.

주체적 기독교 

조금 예민할 수 있는 종교와 철학 간의 관계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어느 영역에서의 '맞다, 틀리다'라는 취지의 글이 아닌 한국 교회를 다니면서 느낀 다소 개인적인 비평이다. 교회는 철학을 단순 종교와 대립되는 영역으로 치부하지 말고 상호보완의 관계로서 활용하기를 희망하며 적는다.




철학은 주체가 '나'이기에 정말 기독교와 대립적 구도를 가질까?

올해 4월 즈음, 거의 7년 만에 예배를 드리는 기회가 생겼다. 기존에 다니던 교회이기도 하여 고향을 다시 찾는 그리움과 설렘이 섞인 마음을 가지고 방문했다. 그날은 마침 창세기라는 꽤나 심오한 주제를 가지고 목사님이 설교를 하셨다. 간단히 설교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1. '하나님'이 주체가 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2. 철학은 '나'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한다. (=기독교와 대립)

3. 스티븐잡스는 불교 중심으로 기독교와 반대되는 사상을 가진다. (=나를 주체로 산다)

4. 결국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에 있으며,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나는 설교를 들으면서 솔직히 큰 반감이 들었다. 그리고 예전부터 생각해 왔던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문제점의 원인이 '주체성'에서 나온다는 것이 명확해졌다. 사실 설교를 진행하신 목사님은 성경의 진리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고 기독교 관점에서 설교내용도 틀린 것이 없었다. 내가 짚고 넘어가고자 하는 부분은 설교를 듣는 청자는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체다'라는 설교는 자칫 청자로 하여금 만연한 수동적 자세로 변질시킬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또한, 기독교에 반대가 되어 보이는 영역을 단순 이분법적인 대립구도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내가 말하는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문제점의 예시는 이렇다.


1. "이제 그 부분은 하나님께 맡겨"를 습관적으로 말한다는 점

2. 찬양 가사 대부분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주제"가 아닌 "나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에 대한 점

3. 모임에서 기도제목을 나눌 때, 기도 제목 주제가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점


1번은 기독교 교인이라면 어른들로부터 많이 들었던 말일 것이다. 어떤 해결하지 못할 것 같은 영역에 도달하면 그 부분부터 하나님께 맡기라는 조언을 많이 한다. 사실 어디부터 해결 가능하고 해결 불가능한지는 해보지 않으면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문제에 대한 경중을 떠나 막연하게 하나님께 맡기라는 말은 그 사람이 주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하고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게 만들 수 있는 위험한 조언이다. 정말 하나님이 주체가 되는 삶이라면, 문제점을 실제로 해결하려는 행위를 함과 동시에 성경을 끊임없이 읽고 멈추지 않는 기도를 하며 기독교적 주체적 행위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체가 되지만 '내가' 직접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기라는 말은 자칫 성경도 읽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는 수동성을 키울 수 있다. 그 누구도 성경을 대신 읽어줄 수 없다.


2번은 찬양 가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릴 적 미국에서 처음 기독교를 접한 나는 'Glorify(영광 돌리다)'라는 찬양 주제가 몸에 베일 정도로 익숙해졌다. 하지만 한국에서 교회를 다니면서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찬양 가사 주제의 상당 부분이 '대속', '보혈'을 다룬다는 것이다. 그 주제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희생' 하신 것이 포인트이다. 즉, 아무 조건 없이 하나님만을 위해 찬양하는 것이 아닌 '내가' 주체가 될 수 있다. ('나를' 위해 피 흘리신, '나를' 위해 대속하신, '나를' 사랑하신) 내가 중심인 가사이기에 좀 더 쉽게 감동받고 심적으로 위로받으며 찬양을 하게 된다. 하지만 삶이 전혀 힘들지 않고 행복할 때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찬양할 수 있냐라는 질문으로 반문하게 된다. 힘들 때는 평범한 가요조차 큰 위로가 될 수 있다. 삶이 팍팍할 때만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이 습관이 된다면 평소에 하나님을 찾는 '하나님이 주체가 된 삶'을 살기 어려워진다.


3번은 기도제목을 나눌 때 자주 나타나는 현상이다. 대형교회를 다니다 보니 여러 사람의 기도제목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기도제목의 주체는 '본인'이었다. "내가 무엇 무엇을 하게 될 텐데 그 일을 잘 진행할 수 있는 힘을 주세요.", "앞으로 이런이런 일이 있을 텐데, 예배를 잘 드릴 수 있는 성실함, 끈기를 주세요." 이 기도제목을 보면 마치 하나님에게 주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기도제목의 주인공은 본인이다. '교회의 부흥',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등의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체가 되는 기도제목은 찾기 어려웠다.






철학에서 말하는 '나'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을 단순히 '하나님에게 주체가 있냐, 아니냐'의 이분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며 대립적 구도로 두어선 안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주체가 되는 삶도 결국 내가 그렇게 믿고 행동해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귀찮아서 성경을 읽지 않는 것도 나의 선택이고 귀찮지만 하나님을 끊임없이 찾는 것도 나의 선택이다. 결국 철학에서 강조하는 주체적인 삶은 기독교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최진석 교수님께서는 '나 홀로 읽는 도덕경'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표현하셨다.

『성경』을 백 번 읽은 사람과 한 번만 읽은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어요. 『성경』을 백 번 읽은 사람은 불자들과도 평화롭게 지냅니다. 그러나 한 번만 읽은 사람은 불자들을 쉽게 적대시합니다. 『반야심경』을 한 번만 읽은 사람과 백 번 읽은 사람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반야심경』을 백 번 읽은 사람은 기독교인과도 잘 지내지만, 한 번만 읽은 사람은 기독교인을 적대시합니다. 한쪽 진영에 갇혀 상대방에게 쉽게 프레임을 씌울 경우엔 어떤 여백도 존재하지 못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궁극에 달한 진리는 틀리지 않을 확률이 크다. 다만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이 틀릴 수 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주체가 되는 삶'을 교회에서 다룰 때는 진정한 주체적 기독교인이 될 수 있도록 나로부터 나오는 행위의 중요성을 알려줘야 한다. 끊임없는 '나'의 노력에서 결실을 맺는 것이며 그 결실을 맺게 되면 틈과 여백을 통해 상대방에게 프레임을 씌우는 일도 없을 것이다.


Photo by B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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