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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Jan 09. 2019

생득 관념, 운명적 불행에 대하여

천부적인 재능은 탐낼만한 가치가 있을까?

 나는 각자 개개인 모두가 자신만의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하기 위해 최대한 많은 것들을 경험해야 하고 특히, 그 경험들은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열정을 쏟아야 한다는 말이다. 끊임없이 자신의 생각들을 믿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고 무엇보다도 그를 위해서 보통의 노력 이상을 해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노력'이라는 말에 반발심이 생길 수도 있다. 실패할 자유가 없는 사회라는 구조에 대한 비판이나 그럴만한 여유를 부리는 건 사치라는 현실주의자를 가장하는 염세주의자들이나 또는 타자의 요구를 충실하게 수행했기 때문에 발생한 세대 갈등 모두 현시대에서 충분히 논해질 자격은 충분하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인식들을 수용하더라도 각자의 삶에서 노력은 굉장히 중요하다. 노력을 해야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너무나도 명백한 성취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는 행동하는 의지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잠재력, 재능, 타고난 기질에 대한 이야기이다. 노력의 여하를 떠나 개개인들의 간의 능력에서부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일단, 잠재력이 있다는 것 자체로 이미 태어나면서 차이가 정해져 있다는 것을 전제하게 된다. 쉽게 말해, 모두 '운'이라는 것이다. 지금 카페에 와서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면서 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운이고, 부잣집에 태어나 비싼 차로 도로를 막힘 없이 질주하는 사람도 운이고, 가난에 찌들어 하루하루를 겨우 연명해나가는 사람도 운이다. 모든 것들이 운이고 이미 정해져 있다고 한다면, 운명의 가혹함에 대해 누군가는 반발심을 갖고 운명을 개척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운명은 그런 사람들의 의지조차도 타고나고 정해져 있다며 다시 운명론적인 사고로 회귀시킨다. 어찌 보면 허무를 강요하는 굉장히 위험한 생각이다.


 이런 운명론적인 사고와 '생득 관념'이라는 개념에 내포된 의미는 굉장히 유사하다. 자유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나면서 결정된 환경적인 요소들뿐만 아니라, 표현대로 태어나면서 마음에 이미 관념들이 내재되어 있어 인생의 전반적인 것들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또한 재능이나 지식뿐만 아니라 도덕적 규범 같은 것들도 이미 인간의 이성에 내재되어 있다는 참으로 난해한 생각이다. 로크는 그의 저서 <인간 지성론>에서 이 개념에 대해 부정했다. 그는 아이들의 행동 양상을 관찰한 것을 토대로 견해를 펼쳤다. 관념이라는 것은 주변 환경을 경험하고 지각에 의한 학습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고 내면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태어난 순간은 백지 상태와 같다는 'Tabula lasa'가 로크 사상의 핵심이다. 즉, 백지와도 같은 생애의 시작점에서부터 어떤 것들이 그려지느냐에 따라 삶의 행로가 결정된다. 하지만 간혹가다 그런 사람들도 있다. 누구는 죽어라 노력해도 불가능한 일을 쉽게 해내는 사람들. 그들을 보면 로크가 말한 것과 같이 백지 상태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다. 이미 그들의 마음속에는 엄청난 능력이 들어 있어서 그것들을 바탕으로 자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한다. 굳이 이 논의를 오래 끌 필요가 있을까? 과학이 진보를 주도하는 현시대에서 이 개념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속담으로 쉽게 이해된다. 부모나 부모의 윗세대를 통한 유전으로 천부적인 재능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흔한 표현으로 '떡잎부터 남다른' 사람들은 대다수의 부러운 시선을 살만한 사람들이다. 이건 현시대가 자본주이여서 그런 것이 아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천재들의 미래에는 확실한 성공이 보장되어 있다. 그들이 삶에서 얻게 될 사회적인 지위나 명성은 꽤나 많은 편리함을 제공한다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자신이 욕망하는 만큼의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천재성은 부러움의 대상이고 열등감의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 일례로,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가려져 영원한 2인자로 남게 된 살리에르의 말은 그의 자격지심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신이시여, 왜 저에게는 욕망하는 만큼 재능을 주지 않으셨습니까?' 개인적으로 천재들이 부럽다. 지금 이 글도 개인적인 열등감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천재라 불린 사람들의 지식을 읽으면서 겸손을 자처하는 건 습관적인 일이 되었지만, 지적인 허영심을 지우지 못해 항상 전전긍긍하는 모습도 익숙하다. 그런데 한편으로 그들의 인생은 통상적으로 말해지는 불행에 굉장히 근접해 있다는 인상을 받는터라 경외심마저 드는 판이다. 그들의 이름은 죽어서까지도 현시대의 담론에 끊임없는 화두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지만 삶은 '평범'과는 거리가 멀었다. 우리는 그들을 '천재'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자신을 천재라고 부르진 않았다. 이 수식어는 어떤 시대를 풍미한 위대한 인물들 앞에서 그 위대함을 기리기 위해 당대나 또는 후대 사람들이 그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즉, 자기 인식과는 별개인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언론에서는 '천재'라는 수식어를 꽤나 쉽게 접할 수 있다. 천재들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프로그램도 있을 정도이다. 천재성을 가진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사회적인 관심과 주변인들의 기대를 받게 된다. 유아기는 비판적인 식견이 아예 없다고도 할 수 있을 때인데, 그런 사람들은 성장하면서 끊임없이 타인들의 시선 속에서 그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 살아왔을 것이다. 이런 걸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하는가. 안타깝게도 타자의 영역은 자신이 진정 욕망하는 것들과 별개인 경우가 많다. 물론, 탁월한 재능이나 소질 같은 것들을 썩히기에는 정말 아깝긴 하고 이런 것들에 자신이 원하는 일이라면 그것만큼 좋은 인생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을 무반성적으로 받아들인 채 스스로에 대한 어떤 의심도 없이 산다는 것은 자신의 욕망이나 원하는 것들을 도외시한 채 남들이 원하는 데로 살고 있다는 것니다. 그런 사람들은 100년이 채 되지 않는 길고도 짧은 인생 동안 꾸준히 공허를 맛보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천부적인 재능을 부러워할만한 가치가 있을까? 나는 여전히 부럽긴 하다. 하지만 모순적으로 부럽긴 해도 불행하다고 여겨질 만한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한 천재들의 삶은 여전히 탐탁지가 않다. 스피노자가 45살에 폐병이 걸려 죽기 전까지 골방에 틀어 박혀 살았다거나 아니면 비트겐슈타인이 자신에게 부여된 고뇌가 불행한 삶이라 여겨 항상 자살 충동에 휩싸여 살았다는 그런 일화들을 보면 분명 그들은 자신의 의지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냥 그렇게 살았다. 보통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는 고충을 항상 안고 있는 천재들은 분명 그 누구보다 뛰어났지만 그들을 보면서 행복하게 살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행복이란 흔히들 말하는 삶의 수순들일 수도 있다.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나를 닮은 자식이 생기고,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늙어서 추억을 회상하면서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이 행복의 전부라는 생각마저도 드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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