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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Jan 14. 2019

홀로 존재하는 인간의 정체성

고독한 인간에 대한 고찰

 '나 자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해보고 싶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질 수 있을까? 여기에 쉽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질문은 텅 비어 있다. 죽기 전까지 이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할 만큼 나 자신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긴 할까?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이 철학적으로 굉장히 무겁고 의미심장한 구절이라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질문이 심오하게 보여도 일상 곳곳에 녹아 있는 형식적인 질문이다. 그 까닭은 개인들은 타인들과 지구라는 행성인 이 세계를 공유하고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항상 나 자신이 아닌 누군가와 깊이 있게 또는 미약하게나마 관련을 맺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다. 오랜 만남을 지속하면서 서로를 잘 이해하는 익숙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완전히 낯설고 새로운 사람과도 만나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소개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사회적 존재'라는 규정 내에서 '나 자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타인이 나에게 던지는 질문으로 '당신은 누구입니까?'와 동일하게 된다.


 낯선 타인과 대면에서 나는 자신의 이름과 나이, 직업 등을 소개하고 미래의 계획이나 포부들 그리고 거창하게는 나의 신념이나 가치관 따위로 나를 말할 수 있다. 남에게 드러내는 나의 모든 것들은 일정한 범주 체계를 형성하고 있는 나 자신이다. 이것을 '실존'이라 부른다. 즉, 나 자신의 가치와 진실성들이고 아니면 거짓된 모습도 포괄하는 자아의 총체성이다. 하지만 나의 국적이나 출신 지역, 부모와 가족들, 그리고 간혹 종교를 얻는 등 의지와는 별개로 우리는 태어나면서 꽤나 많은 것들이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느 누구나 갖고 있는 '이름', 타인이 나를 부를 때 사용하는 고유지시명도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정해 놓은 것들을 통해 나 자신을 소개하는데 도움을 는다. 자유의지와는 무관한 요인들이 결정된 채로 탄생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타인에게 나에 대해 소개할 때 종종 말해지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런 결정된 사안들로 '나'를 칭하기에는 굉장히 모호하다. 왜냐하면 내가 이런 것들을 원하고 스스로 인지 체계를 형성하기 전까지는 나와는 아무런 관련성이 없기 때문이다. 앞서 제시한 모든것들-추상적이든 확실히 정립되어 있든-을 한 단어로 표현하면 '정체성'이다.


 모든 사람들은 '타자의 영역'이라는 얽히고설킨 여러 조건들과 이해관계 속에서 나 자신을 정의내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정체성'에 관한 논의는 인간이 왜 항상 누군가를 만나는 지에 대한 답변을 풀어놓을 수 있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나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외로워서이다. 외로운 인간만이 사람의 온기와 냄새를 그리워 한다. 일단, 하나의 전제가 깔려 있다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고독에 굉장히 취약한 동물이다. 모든 문제들은 외로워서 발생한다 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고독을 혼자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감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고독한 인간의 이면에는 타인이 자신의 자존을 지켜주고 가치를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깔리기 때문이다(메슬로우 욕구 단계 이론의 3단계에 '사회적 인정의 욕구'는 합당하다) 우리가 '가치 있다.'라고 규정하는 것들은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들이다. 사회의 소산이고 대중들의 관심이 우리가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립된 개인은-스스로 고립을 선택하든, 수동적으로 고립된 상태이든-자신을 무가치하게 정의내린다. 고독한 인간은 어떤 것도 관련되지 않은 채 존재하고 있는, 즉 정체성이 모호해진 인간으로 남아 기껏해야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것들로 나를 규정할 수 있겠지만 굉장히 추상적이고 공허한 것들로 나를 채울 수밖에 없게 된다.


 지금은 미술사의 거장으로서 명성을 남긴 반 고흐도 자신의 귀를 자르고 권총의 탄환이 자신의 머리를 관통하기 전까지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의 그림은 그가 죽기 전까지 딱 한점이 팔렸고 생활고는 항상 그를 좇아다녔다. 항상 동생에게 자신의 신세를 맡길 수밖에 없었지만 반 고흐는 분명 자신의 그림들과 그린 대상들을 정말 사랑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항상 희망찬 미래를 계획하고 자신의 의지를 불태우면서 자신의 두 손에 열정을 담았기 때문이다(돈이라도 많았다면 자살은 안했을 것이다) 인생은 홀로 왔다가 홀로 가는 거라고 하지만 태어나기 전에 이미 많은 것들이 결정되어 있는 것처럼 애초에 혼자가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대로 나를 소개하는 것처럼, 정체성은 타자와의 관련성 속에서 향유된다. 반 고흐의 그림은 인상파 예술이 기조였던 시대에 맞지 않게 음침한 느낌이 다분해서 항상 타인들의 관심 밖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에게도 공감 받을 수 없고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무관심 속에서 완성시킨 고독한 자아는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사회에서도 무쓸모한 존재로 정의 내리게 된다. 인간은 고등한 사유와 사회성을 선택하면서 다른 종들보다 더 큰 집단을 형성할 수 있었다. 사회 유대적인 동물이라는 규정에서 고독한 인간의 위치는 진화론적인 퇴행을 의미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반대로, 어쩌면 인간이 고독에 취약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사회성을 선택한 건 아닐지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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