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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Jan 17. 2019

지루한 일상으로부터의 혁명

니체의 '영원 회귀'에 대한 단순한 해석.

 개인적으로 나는 니체를 굉장히 좋아한다. 그래서 고독을 지배하라는 니체의 명령을 그대로 수용하고 실천적으로 살고 있다. 일단 고독을 지배하려면 그에 익숙해지는 게 우선이다 보니 그에 따라 발생한 심리적 문제들도 겪게 되었다(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이런 문제들을 알게 되니 또 현명해지려고만 계속 시도한다. 분명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이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자유의 진정한 가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자유를 통해 삶이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만족스러워진다는 느낌이 더 강해져서 고독을 싫어하지 않게 되었다. 여담이 길었는데, 고독을 지배하는 인간상을 제시한 니체의 '초인 사상'은 너무나 유명해서 굳이 설명을 안해도 많은 정보들을 찾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거창한 꿈이나 가능성이 의심되는 욕망을 품었다면 니체를 예찬해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하는 인터뷰 영상을 보면 니체의 잔상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고독이 정신 건강에 나쁘다는 건 확실하다. 이미 니체도 정신착란에 걸려 말년을 정신병동에서 보냈으니 말이다. 굳이 이 지경이 되도록 이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직접 경험해보는 것이 확실하니 자신이 직접 경험해봐야 한다는 얄궃은 사명감이 있지 않았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냥 대단하다. 니체가 친구에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자네는 내가 얼마나 고독한 지 모를 걸세!'


 '영원 회귀'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에 앞서 일단, '일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한 번 이야기를 하고 싶다. 우리가 일상이라고 흔히 말해지는 것들은 무엇인가? 간단히 하루 세끼 식사를 하고 잠을 자고 친구들을 만나는 일들을 일상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결혼을 계획하거나 나중에는 가정을 꾸리는 당연시되었던 관습적 수순들도 일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일상적인 흔한 일이라 규정해도 무방한 이유는 인류의 역사속에서 수도 없이 있어 왔던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앞으로 말하려는 '일상'의 의미는 좀 더 각별해진다. 대체로 대한민국 현재 젊은 세대들은 초중고로 이어지는 의무 교육을 받고 대다수의 경우라면 대학교에 가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를 잘했든 잘하지 못했든 도합 16년 정도의 시간을 공부에 할애하고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한다. 16년이라니, 생각해보니 말도 안된다. 16년은 둘째라 치더라도 대학교 시절에 강의를 듣는데 약 3,000시간을 소모한다는데 내 시간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무작정 나쁜 건 아니다. 이런 엄청난 교육열이나 근면성실이 대한민국의 급속한 성장에 일조하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으며, 세계적으로는 문맹률 0%에 수렴하는 국가가 되었으니, 이건 자부심을 가질만한 일들이다. 하지만 참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앞으로도 꾸준히 겪어야 하고 씨름해야 할 이 공부라는 것에 질려버렸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을 점유하고 있는 공부에 싫증이 나버렸으니 매일매일 불만스러운 건 전혀 이상한 현상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일상을 '공부'라 규정했지만 자유를 위한 도피를 위해 공부를 접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우리는 이따금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가거나 색다른 경험을 통해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순 있지만 아주 일시적일 뿐이다. 일탈을 꿈꾸며 자유롭고 싶다는 욕망은 지금 발을 붙인 현실이 불만족스럽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고 만약, 정말 특별하고 새롭다고 느낀 일을 일상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해도 그 또한 부지불식 간에 익숙해지고 그 새로움은 어느새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반복이 되어 있다. 아쉽게도 우리는 판에 박힌 것들이나 어깨에 짊어진 것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일상적으로 겪는 그리고 습관적으로 행하는 모든 반복되는 일들을 계속해서 수행해나가야 한다는 것이 명백히 그렇다. 이 매일 반복되는 일들이 우리의 지루함의 원인이다. 이 속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부질없이 느껴지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감정들은 무료함과 권태로움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면 일상이 반복된다는 건 우리의 사고도 일상적인 일들에 맞춰 일정한 궤도를 순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지루함의 요체가 되는 반복들과 우리가 가진 인식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제시해야 한다. 한 번 자신에 대해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오늘 한 생각이 오직 오늘만의 생각이었는가를 말이다. 갑작스럽게 아니면 의식적으로 떠오른 생각이 어제나 또는 어느 과거의 생각이라면 결국 과거를 끊임없이 답습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만큼 비효율적이고 인생을 낭비하는 반복도 있을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한 구절이다. '이 세계는 그대들의 이성, 그대들의 심상, 그대들의 의지, 그대들의 생애 안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그대들 인식하는 자들이여, 그러면 그대들은 그대들의 행복에 도달하게 되리라!'


 시간이 지나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면서 어떤 이유에서든 과거의 것들과 자연스럽게 멀어지는 것 같다. 단순히 사긴이 모든 것들을 변화시키면서 나의 생각도 점진적인 변화를 겪었거나 아니면 성장하면서 과거의 것들에 지루해지고 새로운 것들에 눈을 돌리게 되는 건 아닌가 싶다. 과거의 퇴색된 의미는 새로운 추억이 되는 과정일 뿐이다. 하지만 분명 우리는 지금은 유치하고 별 것 아닌 시시한 일들에 흥미를 갖고 열광하던 시절이 있었다. 어린 시절에 분명 나는 '레고'나 '장난감 로봇'에 열광했다. 니체에게 초인은 '어린아이'이다. 당연히 미성숙하고 철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니체는 아이의 모든 것들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열린 사고와 모든 것들을 추궁하는 호기심을 가진 인간을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규정했다. 이런 관점에서 '영원 회귀'란 일상처럼 동일성의 무한한 반복이 아니다. 이 개념은 아주 작던지 크던지, 어떤 차이가 기준이 되어 과거와 현재를 확실히 분할하고 구분 짓게 된다. 이를 통해 과거의 나를 잊은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면서 자신의 가능성을 계속 확장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일상적인 지루함을 극복하고 극복한 것들이 다시 일상적으로 다가오면 또다시 극복되는, 이 차이의 무한한 굴례가 니체의 완성형으로 나아가는 순환 '영원 회귀'이다. 성인이 되어버린 지금에 와서 아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건 불가능한 시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아이와 같은 눈동자로 세상을 바라보고 불합리한 사고의 양태들을 깨부수고 스스로 가치를 창출하는 인간이 되었을 때, 그마저도 다시 굳혀지고 또다시 극복해야 할 그 무엇으로 남는다. 나는 공부를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 하면 할수록 내가 무지하다는 생각밖에 안든다. 타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언정 스스로 해내기 전까지는 나의 것이 아닌 것이다. 글을 쓰다보면 항상 되새김질을 하는 계기를 만들게 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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