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밤이 Jun 28. 2019

주관적인 고통과 보상심리

의무와 권리의 사적인 이해 방식.

 노력에는 반드시 보상이 따라야 한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라는 말은 스스로의 의지를 배반하지 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반면에 앞의 말은 이 세계의 은밀한 질서이기도 하면서 사회적 문제들과도 직결된다. 즉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무런 보상도 얻지 못한 노력이 문제가 되는 건 어떤 누군가가 자신의 존재 가치를 함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어떤 보상이라고 했을 때, 자본주의의 논리에 걸맞게 경제적인 보상으로 모든 보상적 가치들을 정의할 수도 있겠지만, 더 넓게는 우리의 모든 심리적인 것들, 즉 언어로 명료하게 말할 수 없는 애매한 긍정성들도 포괄한다. 그런데 문제시되는 것들은 광의의 의미로서의 보상을 충족시키기 못하는 어떤 노력들, 어떤 행동들, 본질적으로는 생각들이다. 이미 존중은 생각하는 행위 자체와 접해 있다. 이는 절대적인 위상을 차지한다. 그런데 살다 보면 분명 자기 존중이 소외되는 사건의 발생하고 이는 내적 근력을 상실케 한다.


 사회적인 문제의 심급으로 대두되는 웬만큼의 문제들은 불평등에 기인한다. 또 평등이 절대적인 가치일 수 없는 담론들이 끊이질 않는다. 자본주의, 그리고 '자유시장'은 개인이 노력한 만큼 보상을 얻을 수 있는 구조이다. 자본주의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으려면 이보다 더 나은 답이 될 수 있는 이념을 들이밀어야 할 것이다. 자유 진영의 대항마라 할 수 있는 공산주의를 표방한 소련이 문을 닫은 시점은 현재로부터 그리 오래되지 않은 과거이다. 이미 역사적으로 오답이라고 낙인이 찍혔고, 불가능이라고 말해준다. 그런데 그 잔재들이 여전히 묻어 있는 국가들은 이상향적인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활용해서 대중들을 이끌지만, 실제적으로 독재 또는 전제군주정을 유지하고 있다. 무엇이 사회주의이고 공산주의인가?


 개인은 세계와 맞선다. 한 개인은 세계 속에 던져진 이방인이다. '평등'이라는 윤리적 가치는 세계에로 존재하는 개개인들이 모두 다르게 시작한다는 불편한 사실에 대해 반문한다. 그리고 세계의 고통을 스스로가 고스란히 감내해야 한다는 불합리성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평등 자체는 목적이 될 수 없다. 이것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들은 그것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거나 도덕적 우월감에 심취해 맹목적으로 따르는 경향이 있는데, 불가능을 의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목적성은 항상 불가능을 관념적으로 염두할 수밖에 없고 인식적인 불일치를 경험한다. 그런데 이런 가치적 관념의 도움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어떤 고난과 시련에 굴복하지 않고 모든 것들을 극복해 낸 사람들이 종종 등장한다. 그들은 노력만으로도 충분히 가장 밑바닥에서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자신을 통해서 증명한다. 영웅적인 의지를 가진 사람들의 성공 스토리는 다수의 입장을 대변한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한들 절대다수의 표본이 될 순 없다. 모두가 영웅적이지는 않다. 각자에게 할당된 의지는 다르다. 그럼에도 이를 추종케 하는 원동력이 있다면 절대다수가 주관적인 고통에 직면하고 있고 이를 극복하기를 희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희망적 사고가 이 시대가 수호할만한 인물들을 숭상하는 현상의 본질이다. 이들의 상징적인 삶을 무작정 따르는 것이 유일한 방편이고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의지적 행위인 인간의 노력이 숭고하다는 것에 이견을 달기란 어렵다. 노력하지 않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이 당연하고 또한 차등적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발전의 동기가 사라진다. 발전이 없는 것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도태이다. 이에 대해 유일한 이견이라고 한다면 의지하는 행위가 고통이라며 염세주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이 또한 맹점이 존재하는 사고방식으로, 모든 것들을 무의미하고 무가치하게 여겨 자신의 눈동자에 회색을 억지로 칠했을 뿐이다. 회색을 칠한다고 본연의 색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대다수가 극복 이전에 마주한 실존적 문제들에 언제나 휘둘린다. 또한 탄생한 순간에 주어진 권리란 평등하지 않다. 평등의 문제는 여기서 다시금 회부되는데, 권리와 의무는 동전의 양면처럼 들러붙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유 시장에 따라 권리는 더 이상 사회적인 의무를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자본주의에서 찾아진 권리란 자신이 얼마나 노력했는지가 기준이 된다. 모든 문제는 올바르고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개인이 떠맡게 되었다. 또한 의무란 사적인 개념으로 재평가된다. 사회적 의무란 최소한으로 축소되고, 그 이상은 개인에게 짊어진 의무로서 개인의 역량에 따른 보상으로 환원된다. 즉 의무란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노력이고, 권리란 고통에 따른 보상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신념이나 연민이 투철한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자신의 권리를 누군가에게 줄 필요도 없고 그렇다고 주기도 싫다. 현재란 언제나 과거에 실존했었던 쾌고의 기억들과 공존한다. 더 이상 권리와 의무는 등가적이지 않다. 자유 앞에서 이 두 요소는 주관적으로만 이해된다. 더 많은 의무가 권리를 얻지 못할 수도 있고 아무런 의무 없이 권리를 누릴 수도 있다. 이것이 적절하지 않은가? 적절하지 않았을 때 추문이 형성되는 것이 전부이다. 더 적절한 혜안을 찾지 않는 이상 '자유시장'에 의존해 있을 수밖에 없다. 누군가 아무리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충분히 극복 가능한 일일 지도 모를 일이다. 왜냐하면 그보다 더 좋지 않은 상황에서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작가의 이전글 항구적 비반성적 자아의 도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