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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Jun 28. 2019

항구적 비반성적 자아의 도래

필요 이상의 회의감에 대한 불필요성

 의심은 언제나 다시 새로워지는 이런 애매함에서 기인하며, 그것은 현상의 환영 자체를 구성한다. 하지만 그 의심은, 충분히 명료한 세계 속에 놓인 매우 잘 구분되는 존재들을 시선의 예리함이 그릇되게 혼동하지 않았을까 하고 의심하지는 않는다. 나아가 이 세계의 형상들이 지니는 항구성이 사실은 쉼 없이 생성에 의해 마련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지도 않는다. 그 의심은 나타나는 것의 진솔성을 문제 삼는다. 침묵하는 불분명한 이 같은 환영 속에서 거짓이 말해진다는 듯이, 오류의 위험이 속임수로부터 비롯된다는 듯이, 침묵이 말의 양심일 따름이라는 듯이 말이다.
- Emmanuel Levinas <전체성과 무한> -


 우리는 종종 의심을 한다. 의심을 반복한다. 아무래도 이런 의심을 하는 이유는 낯선 것들에 대한 추문이자 항변이다. 우리는 낯선 사람을 의심하기도 하고 또 나열된 객관적이라고 하는 지식들에 대해서도 확증성을 요구한다. 때로는 어떤 권위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기도 하지만, 데카르트적으로 그것이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을 일부러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리고 세계에 대해서 의심한다. 세계 속의 일부인 나 자신도 언제나 그 대상이 된다. 반면, 의심하지 않는 것들이 존재한다. 의심하지 않는 것들은 확신하는 것들이다. 의심이 차오르는 곳은 믿음이 결여된 부분이다. 예컨대, 우리는 공기가 없다는 것을 의심하는가? 아마 이런 의심을 해 본다는 건 굉장히 무의미할 것이다. 이미 존재가 포착한 것들에 대해서는 결코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 명료해진다. 때마침 봄바람과 함께 미세 먼지로 인해 공기 청정도가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었는데, 그 조차도 공기의 질을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의 문제였지, 공기가 없다는 문제는 아니었다. 이 해괴한 생각이 가능하려면 당장 숨이 막히기 시작해야만 한다. 그런데 만약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되면 그럴 겨를도 없이 살기 위해서 공기를 찾아 나서는 일이 우선이 된다.


 아마 이런 의심을 해보는 의심은 학문적 탐구의 원동력이면서 모든 낯섦에 대한 저항적 정신이 되듯, 탁월한 지식을 축적할 수 있는 정관자로서의 축복이라 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이는 저주와 같을지도 모른다. 의심이 정신에 표상하는 방식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나의 환상에 대해 일침을 가한다. 나의 세계 또는 타자의 세계의 오류를 들추어내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는 나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일종의 반성이다. 의심하는 사고 작용은 내가 목표하거나 기대한 미래의 일이 가능한 일인지에 대한 충분성을 묻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필요한 일인가? 한 편으로는 우리는 그것이 왜 필요한 지에 대한 의문을 가져야 한다. 왜 우리는 각자의 최대치의 목표점에 대해서 의심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변이 필요한가? 공기가 없어서 의심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일부러 해볼 수 있는 그런 것이라 하더라도 의심의 시작은 믿음이 머물지 않는 곳이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하기에 앞서 얼마나 많은 것들을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반성은 파괴성이 은밀하게 작용하는 운동이다. 어떤 일을 반성한다는 건 그 일이 잘 못 되었을 때 일어나는데, 반성 자체가 이미 나의 잘못된 부분을 들추어낸다. 그리고 그 이상은 본래적 자아조차도 무시한다. 그 이상의 반성은 무얼 위한 일인가? 니체가 개인들을 미리 규정짓는 모든 인식적 틀을(그것이 윤리일지언정) 파괴시키고자  이유는 순수한 역량을 보존하기 위한 의도이다. 신의 죽음을 고한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현시대의 가장 유효하다고 또 유효해야 할 철학적 담론이라면 삶을 지켜주는 논의들이다. 철학의 종국적인 목표라고 한다면, 우리를 본래적이고 비반성적인 자아로 이 세계와 결부시키는 것이다. 비반성적 삶은 더 이상 내가 이루어 낼 수 있는 최대치에 대해서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것에 대해 가능성을 이래저래 따져보면서 늘어지는 시간을 만드는 것이 아닌 그 자체가 이미 가능한 일이라는 미신적인 믿음을 갖는 것이다. 여전히 미심쩍다 해도 말이다. 앞서 공기에 대한 예시들과 같이, 우리의 반성적 사고의 모든 대상들은 믿음이 결부되어 있지 않은 곳에서 시작된다. 반성하지 않는 의식의 영역은 순전한 향유의 자아로서, 자기 자신이 절대적으로 보전되는 지평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다. 사건의 지평선, 더 이상 존재의 빛이 미칠 수 없는 음영인 영역. 그곳은 애매모호하고 어둡기 때문에 착각과 오도가 뒤섞인 혼란의 장이다.


 미지의 영역에 대한 태도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힘은 자유로운 발상으로 맹점을 뚫어내기도 하지만 또한 본래성을 은폐시키는 힘의 역작용이다. 그것을 우리는 '상상'이라고 이름한다. 모든 상상력들의 중점은 최초의 원인자에서 시작되는, 대상화를 허용하지 않는 인식의 불가침의 영역이다. 그런데 또한 불가침한 것들은 불가해하다. 나의 반성이 아무리 애쓴다고 한들 실존의 본래성은 파괴되지 않는다. 이것이 확인되는 건 또한 철저한 반성 이후에 주어지는 권리이다. 비가 온 뒤에 땅이 굳듯이, 고착화된 존재는 요동치는 물결을 견뎌낸 시간들 이후에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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