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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Jun 16. 2019

현세태에 대한 무기력한 비판

망상적인 불안감에 취해서 쓴 글

 시중에 쏟아지는 도서들 중 포스트-모던한 색채가 강하게 묻어 있는 것들이 널리 퍼지는 이유는 그런 류의 책을 대중들이 선호하기 때문이다. 즉 자유 시장의 소비 원리와도 일맥하는데, 이는 집단 무의식의 지향점과 그로 인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또 현재가 21세기이고 그 전의 20세기에 가장 큰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학문적 사조인 만큼 후폭풍이 잔류하고 있다는 건 전혀 낯설지 않다. 특히 구조적 병폐에 대한 비판과 주체성을 상실한 시대를 강하게 꼬집는 사상이니 만큼 현시대에 이것보다 더 유효한 생각들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민적 교양을 함양하는 일에는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진 몰라도, 결론적으로 문제의식으로만 그치고 만다. 아무리 중요성이 강조된다고 한들 아무런 해답도 내어놓지 못하고 아무런 변화도 감행할 수 없다면 그것이 정말 필요할까? 그것이 현시대의 흘러넘치는 이기심을 해명할 수는 있더라도 그것으로 그친다는 것이 문제다. 답이 없다는 답은 허무주의와 조우할 뿐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 그 무엇도 실현할 수 없다는 무기력감, 그 무엇도 밝힐 수 없다는 빛의 은폐로 성립한다. 그러다가 이 시대의 합리주의가 결합 가능한 모든 것들이 최대치에 도달해 있다는 라이프니츠의 정수에 묻혀 버린다. 내가 만든 세계에서 탈출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자신을 가장 잘 대변하는 입, 즉 Logos의 의미가 평가절하된 시대가 현시대이다. 이 또한 합리주의의 결과라고는 할 수 없다. 말로써 나를 증명하는 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지켜져 왔기에, 이 개념의 영원성과 불변성에 이견을 달기란 어려울 것이다. 일상적으로 만나는 익숙하든 낯설든 한 사람들과도 대화를 통해 소통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Logos의 위력이 무색할 정도로 앞으로 미래가 될 세대들이 배움의 장에서 수년을 보냈어도 입에서 한 마디 뗄 수 없는 게 작금이다. 그리고 입을 대체하는 수많은 도구들과 수단들, 자아의 본래성을 허구적인 자아로 환유시켜버리는 주변의 파생 실재들과의 의미작용이 눈에 띄게 두드러진다. 많은 사람들이 꽤 노력하는-어쩌면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한다는 억지스러움을 가장하고 있는-세상임에도 내 귀에는 자신의 빛을 밝히는 어떤 애정 어린 말들도 들리지 않는다. 정말 자신이 추구하는 바가 확실한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할 말이 꽤나 많다. 그런데 막상 그렇다고 한 사람들조차도 간주관성에 갇힌 채 생각들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이 곳에서 독창성이란 허상에 그치고 만다. 모두가 획일화되어 자동인형으로서의 삶에 만족하는 척한다. 괴벨스의 말대로 대중들은 관대하게 지배당하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어떤 말도 할 수 없을지라도 '말이 없는 경험'으로 가득 찬 사람들은 꽤 괜찮은 삶을 살고 있을 거라는 희망에 봉착하지만, 이미 가짜들이 판을 치는 엉망진창인 세상이 두 눈동자에 맺힌 세상의 모습이다.


 어지간히 반사회적 정서를 품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확실한 것이 레드 콤플레스의 참여자로 행위하면서 현실 논리를 따르지 않는 모든 경향성들을 비판한다. 아무리 사회를 비판한다고 한들 문제의식을 갖는 것이 답은 아니다. 문제를 거들먹거리는 일은-그것이 정도의 차이가 있더라도-누구나 할 수 있다. 목청만 키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마땅한 답을 찾는 일이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이상적인 가치라 할지라도 현실과의 관계 맺음을 실패하는 생각은, 과격하게는, 폐기 처분시켜야 함이 마땅하다. 진화론에서 미싱링크를 찾지 못해서 언제나 창조론자들의 논박에 시달리는 것처럼, 현실과 이상의 간격을 무마할 수 있는 매듭을 찾지 못한다면 모든 사고는 몽상에 그치고 만다. 그런데 애석한 것은 혜안은 이미 주어져 있음에도 그것이 환상처럼 여겨진다. 그를 따르는 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그건 애초에 인간의 의식 수준에서 불가능한 일일 지 모른다. 그래서 불가능을 생각한다. 불가능을 목도할 때 왜 그것이 불가능한지에 대한 이유를 밝히는 데에 모든 의지가 소여되고 노동이 경주한다. 


 먹고사는 문제는 인간에게 붙어 다니는 눌언이다. 언제나 마음을 요란스럽게 헤집어 놓는 말들이다. 실패할 자유가 없는 곳에서의 자유란 무엇인가? 자유가 잔존한다면 퇴색된 의미들로 자유를 해석하고 있을 것이다. 현시대의 자유는 존재를 은폐시킨 채 배부른 돼지들의 말들로만 해석될 여지가 다분하다. 아마 절실함을 함축하고 있는 자유를 찾을 수 있는 곳은 역시나 역사 속에서 계급적 투쟁의 주체들이 목놓아 부르짖었던 외침들이었다. 그런 사건들은 어느 정도의 간격을 두고 빈번히 발생했었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이 형이상학적인 질서가 아닐까? 혼란과 질서가 서로에게 회귀하는 것이 이 세계의 은밀한 목적이지 않을까? 어떤 체제라는 것을 뜯어고친다는 건 임시적인 방편이라고 생각된다. 어떤 것이 문제가 된다면 그리고 그것이 과도하게 계상된 구조적인 결함이라면, 어차피 알아서 붕괴되도록 방치해두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사로 보인다. 왜냐하면 언제나 많은 피를 흘려야만이 무언가가 변했더라. 인간은 실수를 해야 후회를 한다. 실수하기 전에 후회를 한다는 건 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앞질러가는 반성은 궤변에 그치고 만다. 그런데 반성 자체가 원래 정신 건강에는 별로 좋지 못한 일이라 그렇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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