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퍼즐 맞추기 게임
세계에 운명지어진 자아와의 만남
이 세계에 어떤 목적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우주로 시선을 돌리면 인간의 유한한 삶이란 짧디 짧고, 광활한 우주에 비하면 신체의 크기는 미세 먼지와도 같고,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는 불순분자와도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간다. 세계와 그리고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이다. 특별한 목적이 밝혀지지 않은 세계에서 만약 세계에로 존재하는 인간의 삶에 목적이란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퍼즐 놀이'와 같을 것이다. '퍼즐 놀이'는 퍼즐판이 있고 그 판에 알맞게 나누어진 구획에 맞게 퍼즐 조각을 끼워 맞추는 게임이다. 퍼즐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퍼즐 조각을 정확한 자리에 놓아야 한다. 게임의 규칙으로 참가하는 사람은 절대로 퍼즐 조각을 다른 자리에 끼울 수 없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퍼즐 놀이'는 위에서 설명한 퍼즐 맞추기 게임과는 다르다. 여기서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퍼즐 조각이 주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 첫 번째이고, 판의 구획에 맞지 않더라도 그곳에 맞지 않는 다른 조각을 욱여넣을 수 있다는 것이 두 번째이다.
첫 번째 문제로 퍼즐 조각이 주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얻게 되는 것은 퍼즐판뿐이다. 세계에 존재하는 개개인들은 모두 가지고 있는 판이 다르다. 모든 각자들은 세계 속에서 자신에게 운명지어진 퍼즐 조각을 획득한다. 퍼즐 조각을 하나하나 발견함으로써 퍼즐판을 완성해나간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퍼즐 조각을 하나하나 맞춰가면서 얻게 되는 성취감과 끝이 보인다는 희망적인 기대에 사로 잡힌다. 자기 자신에게서 열정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옳다는 확증성은 향유적 감수성에 기대어 있겠지만 우리가 즐겁다는 말 한마디만큼 확연히 인지할 수 있는 것이 또 있을까? 이 문제는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조각을 찾아나가는 여정은 결코 자신을 해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노력은 거들뿐이다. 본래성은 자신을 그리로 자연스럽게 이끈다. 어쩌면 인간 존재는 세계에 내맡겨진 채, 자신의 현상에 따라 자유롭게 행위한다면 퍼즐판을 완성하고, 그 판에 그려진 그림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개별적인 목적이 주체의 존재 이유가 된다.
두 번째로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에게 맞지도 않는 퍼즐 조각을 획득하고 그것을 자신의 판에 욱여넣는 것이다. 여기서는 노력이 지대한 역할을 차지한다. 오로지 노력에 따른 고통에 의해서만이 퍼즐판의 그림을 완성한다. 판의 구획에 맞지 않는 조각을 끼워 맞추기 위해서는 조각을 억지로 변형시켜야 한다. 퍼즐의 획에 맞게 조각을 자르고 구부러뜨리는 식으로 해서 어떻게든 끼워 맞춘다. 하지만 판은 절대적으로 불변이다. 여기서 나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건 착각이다. 나는 나의 판에 맞지 않게 살고 있기 때문에 나에게서 괴리감을 느끼게 된다. 나와 내가 동떨어져 있다. 그럴수록 나는 나에게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중심이 없는 채로 존재한다. 그런 사람들은 항상 누군가와 나를 비교 선상에 올려두고 두 가지 방식으로 행위한다. 하나는 나의 자존을 깎아내리면서 타자에게 수용되면서 옳음의 의미를 찾거나 아니면 타인을 깎아내려야만이 내가 옳다는 의미를 고취시킬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항상 타인을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게 문제가 된다. 어떤 방식을 선택하든 간에 타인과의 결합을 꾀함으로써 내가 나 자신에게 고독하다는 것을 감출 수 있게 되지만, 고독은 여전히 잔존하고 결국 누군가의 인정 속에서만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그 그림이 완성되었다 한들, 나에게 유일한 의미를 가질 그림은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는다.
유태인들은 남녀 가릴 것 없이 20살이 되면 군에 입대한다. 23살에 군복무를 마친 이후에는 번 돈으로 7년 동안 세계 여행을 다닌다. 그저, 랜드마크를 본다거나 자연경관에 심취해 칸트적 의미로 숭고함을 느끼려고 여행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수많은 일들을 직접 경험한다. 그리고 마침내 30살이 되었을 때 결정을 한다. 그들이 무엇을 했을 때 가장 행복했고 또 앞으로는 어떤 일을 하면서 살 지에 대해서 결심한다. 어쩌면 돈과 명예와 같은 것들은 그들에게 부차적인 목적이 될 수도 있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감으로써 얻게 되는 감성의 차원은 타인의 인정이나 아니면 소비 행위에서 찾아지는 경제적 효용과는 별개의 영역이다. 유태인들을 보라. 미국 자본에 50%를 움켜쥐고 있으면서, 학문적으로 내로라하는 기라성 같은 학자들 중에서도 그 민족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출애굽>에서 전하기를 이집트의 노예들이 그들이었고, 홀로코스트의 피해자가 그들이었고, 자신들의 집도 없이 뿔뿔이 흩어져 유목 생활을 해야 했던 열등한 민족이었다. 유태인들은 부당한 대우에 대해 처신하기 위해서 탈무드 같은 율법을 만들었을까? 어릴 때 철저히 역사 교육도 한다고 하니 지금 그들이 누리거나 차지하고 있는 모든 영예로움들은 역사에 대한 반감이자 열등의 표상이지 않을까? 좌우지간, 탈무드를 기반으로 한 유태인적인 삶의 방식과 오래된 지혜가 전혀 나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위의 글은 탈무드의 내용이 아니고, 유태인들의 이야기도 나의 친구가 우리 또래 유태인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건네 들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