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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May 25. 2019

실존적 무기력과 무의식적 반작용

의식을 규정하는 무의식에 대한 규정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상태가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의식은 항상 어딘가로 향한다. 의식이 아무 곳도 향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허하다는 뜻이다. 의식이 지각과 동일하다면 자는 순간을 제외하고는 의식은 이 세계를 항상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자면서도 꿈이란 것을 꾸지 않는가? 의식이 향하는 곳이 어디일 진 사적으로만 이해될 테지만, 보편적으로 '욕망하지 않음'을 스스로 시도하고 있다고 한들 그 조차도 '욕망하지 않음'을 욕망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런 욕망이 없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시도가 가능하면 할수록, 지금껏 내가 원해왔던 것들이 무의미하다고 치부할수록 존재는 유희의 대상을 추구하게 된다. 주체적으로 어떤 사물의 형상을 바꾼다는 건 단순히 사물이 변화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변화의 요인은 나의 상상력이고 그 순간에 존재는 유희적이다. 그런데 이를 반대로 생각해보면 내가 즐겁지 않을수록 나의 욕망과는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고독은 순전한 '나'에 대한 무시이다. 고독은 내가 나의 존재가 가질 의미들을 무시함으로써 얻어진다. 반면 내가 나를 존중했을 때 고독은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망각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인간의 모든 학대적인 성향의 근원은 고독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폭력성으로 인한 외로움은 인간에게 무기력을 선사하지만, 동시에 나에게 주어지는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여기서 문제시되는 것은 내가 나에 대해 항상 소홀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의 극복은 내가 나를 찾음으로써 얻어진다. 가장 순수한 곳에서 솟아오르는 나의 바람을 실현시켰을 때 나는 나로서 살게 된다. 나는 세계 속에 존재한다. 내가 원하는 일 또한 이 세계의 어떤 대상과의 실존이다. 실존적 향유 속에서 존재는 고통도 없고 아무런 노력도 기울이지 않는다. 노력은 보상을 받아야 하지만 향유하는 자에게는 내가 누리는 일 자체가 심리적 효용을 만들어 주기 때문에 아무런 보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기지 못한다는 말에 함의는 즐기는 자에게 승패조차 무의미해진다는 것이다. 즐기는 자에게 굳이 의미 있는 말을 찾자면 매 순간 승리의 향연이다.


 내가 나를 의심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는 내가 지금껏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을 의심해봄으로써 본래적인 '나'에게로 회귀시키는 것이다. 본래성은 거부할 수 없는 영역이다. 인간의 본래적인 욕망은 의심하면 할수록 자신을 더욱더 거부할 수 없게 만든다. 그래서 실존적 무기력은 본래성의 저항이다. 내가 의식적으로 회의를 품는 이유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진정 나 자신을 위하는 일인지에 대해서 존재적으로 돌아보기를 희망한다. 그런데 이 회의란 내가 이미 나 자신에 대해서 실증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이런 회의는 무의식적인 반작용이다. 존재는 모든 존재자들에게 선구적으로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의식에 항상 앞선다. 만약 내가 원하는 데로 삶을 구축하고 있다면 내가 나 자신에 대해 회의를 가질 이유는 전혀 없다. 대체적으로 피학적인 사람들을 관찰해보면 자기반성이 지나치게 철저하다. 이런 성향의 사람들에게 자기반성은 비판을 넘어서 비난에 이르고, 탁월함과 우월성이라는 보상적인 감정으로 은폐되어 있다. 그런데 실제로 피학적인 비판을 스스로에게 부과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로 가득하다.


 그런데 나 자신을 문제 삼는 것 자체는 애초부터 문제이다. 이 문제의 성질은 내가 나 자신에게 부여하는 벌과 같다. 예컨대, 우리는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는다. 반성에서 처벌의 성격에서 발견되는 건, 반성이 어떤 기준에 의해서 나의 존재를 문제 삼는다는 데에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가 나를 반성하는 것도 법제적인 처벌만큼 자유를 극단적으로 억압하지는 않지만 유사한 성격을 띤다. 즉 나를 억압하는 것으로 나 스스로가 내 자유에 대해서 반문을 갖는 것이다. 그로써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죄의식을 갖는다. 이것은 반성의 본질이다. 그리고 반성 또한 의식적일 수 있지만 존재가 선행한다는 것이다. 존재적인 썩어 들어가는 느낌이 선행하기 때문에 나는 항상 무의식적으로 반성한다. 아래 하이데거의 주장대로 존재의 선행적 느낌과 무의식적인 반향을 잘 보여준다.

 불쾌감 속에서 현존재는 그 자신에 대해서 맹목적이 되며, 배려되고 있는 주위세계는 베일에 덮이며, 배려의 둘러봄은 잘못 인도된다. 처해 있음은 반성되기는커녕 오히려 무반성적으로 배려된 "세계"에 몸을 내맡기며 내던지면서 현존재를 덮친다. 기분은 덮친다. 기분은 "밖"엣부터 오는 것도 "안"에서부터 오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세계-내-존재의 방식으로서 이 세계-내-존재 자체에서부터 피어 올라온다.
- Martin Heidegger <존재와 시간> -

 인간이 항상 의식적이라 할 수 있는가?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이 탄생한 유래는 독일의 절대적 관념론이 왜 불가능한 지에 대한 의심에서 시작되었다. 쉽게 말해, 왜 인간이 생각대로 살지 못하는가에 대한 의문이 정신분석을 창시했다. 그런데 앞서 정신을 탐구하는 것만으로 존재의 문제를 해결할 순 없다. 존재는 적절한 언어를 통해 칭해짐으로써 무의식적인 반향은 의식적으로 회귀한다. 우리가 느끼는 모든 무의식적인 현전은 존재가 이미 세계를 향해 뿜어내고 있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죽음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은 자신의 삶에 언젠간 발생할 숙명에 대해 미리 앞질러 가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언제 발생할지 모를 죽음과 현재 사이의 시간적 공백에 대해서도 물음을 던지게 된다. 그 여백은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항상 문제 삼는다.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스티브 잡스는 하버드대 철학과 중퇴이다. 그가 한 말에서, 분명 그는 하이데거를 공부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데 잡스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봄으로써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의문시 했지 죽음 자체를 의문시하지 않았다. 우리의 삶에 던져지는 질문으로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공허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이미 내가 공허하기 때문에 존재는 죽음을 상기한다. 존재의 공허는 죽음 자체에 의문을 갖는다. 삶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죽음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것이다. 허무주의의 맹점이 있다면, 의식과 무의식을 구분하기가 힘들긴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소여 되는 물음에 대해 구분을 하지 못하고 있다. 아무런 목표가 없는 삶, 자신이 지향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공허의 이유이다. 그 이유에 대해 현시대의 풍토에 빗대어 이야기하자면, 자기 자신이 진정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오직 생존의 문제에만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공허하다는 것은 아무런 기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삶에 대한 즐거움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내가 내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싫증을 느낀다는 뜻이다. 여기서 존재는 항시 타는 목마름에 무언가를 채워 달라고 애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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