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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May 25. 2019

자유롭지 않은 선택에 대해서

판단과 변화의 중심인 개인의 역사성

 과거는 한 개인에게 한해서 굉장히 중요하다. 과거를 신경쓰지 말라는 말은 과거를 신경 쓴 이후에나 실현 가능한 말이다. 인간 존재가 현재를 지속적인 긍정성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각자가 지닌 내밀한 역사성과의 긴밀한 관계를 파악해야 한다. 현재는 과거의 총체 그 이상이다. 우리는 현재에 머무르지만 과거를 돌아보기도 하고 미래를 기대할 수도 있는 의지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의지는 자유롭지 않다. 의지는 나의 존재가 지금까지 축적해 온 경험들과 지식을 기반으로 해서 미래의 잠재력을 규정한다. 역사는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라고도 하지 않는가? 의지의 자유란 과거에 의존해 있고, 미래란 과거를 중축으로 파생된다. 그래서 미래를 향해 있는 모든 의식의 지향 활동은 자유롭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스스로 착각이라 할 정도로 애매성을 갖는 이유는 과거에 의해 제한된 의미를 부여 받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는 떡볶이를 굉장히 좋아한다. 오늘 떡볶이가 갑자기 먹고 싶어져서 나는 저녁에 떡볶이를 먹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결심한 데로 내가 좋아하는 떡볶이를 먹었다고 하자. 내가 오늘 떡볶이를 먹기로 결심했고 먹었다고 한다면 그 행동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나는 내가 좋아하는 떡볶이를 먹었지만 다른 말로 내가 좋아했었고 계속 그래 왔었던 떡볶이를 먹은 것이다. 나는 과거의 어떤 순간을 현재에 재현했다. 즉 내가 떡볶이를 먹고자 한 의지적 행동은 오래전부터 내가 떡볶이를 좋아했었던 느낌에 기대어 있다. 반면 나는 캐비어를 좋아할 순 없다. 왜냐하면 캐비어를 먹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캐비어를 먹기로 한다면 그것은 호기심 때문이지 과거에 기대어 있는 것은 아니다. 나의 어떤 선택은 호기심과 습관적인 기억으로 구성된다. 이 둘의 차이가 있다면 호기심은 망설임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과거는 내가 이미 그것에 대해 좋았던 기억을 체현하고 있기 때문에 선택하는 데 있어 아무런 거리낌이 없다.


 현재의 삶은 현재였었던 삶들의 총체이다. '생애'라는 한 주기 내에서 개인이 내리는 모든 선택들이 그 사람의 삶을 구성한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선택들이 자율적이든, 아니면 타율적이든 일련의 연속적인 과정은 앞으로도 발생할 선택에 유사성을 강제한다. 그래서 처음이 중요해진다. 첫 단추를 잘 꾀야 한다는 말은 과거의 선택이 현재까지 전반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데에 있다. 어떤 선택이든 과거에 기대어 있기 때문에 선택은 자유롭지만 자유롭지만은 않다. 과거의 '좋음'에 의존해 있는 행복한 순간을 실현하는데 있어 그것이 자유롭다 한다면 자유라고 할 수 있겠지만, 진정 자유롭다고 할 수 있는 건 과거를 완벽하게 무시하는 것이다. 이것은 익숙함에 대한 완벽한 탈출이다. 자율적으로 선택을 하든 타율적으로 선택을 하든 간에 현재의 어떤 선택은 가장 최초로 발생한 어떤 충격에 의해 편향되어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미래에 대해 갖는 기대와 희망적인 사고들 모두 과거에 의존해 있다. 과거는 그래서 중요하다. 만약 과거가 실패의 사례들과 절망적인 경험들로 가득하다면 그만큼 내가 미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잠재력의 폭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확실하지 않은 것들과 불합리한 경험들을 통해 만들어진 무기력했었던 시절은 무의식적으로 두려움을 갖게 만든다.


 무의식이란 내가 나에 대해 몰지각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의식은 의식하는 순간 무의식이 아니게 된다. 내가 나를 과소평가하는 정도와 미래를 향해 뻗어나가는 의지가 닿지 못하는 곳은 무의식이 저항하는 곳이다. 내 의식이 지향하지 못하는 곳은 또한 나의 믿음에 대해 회의를 품게 만든다. 그 이유는 온전치 못했었던 과거가 나의 의식의 이편에 입점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재적으로 내가 욕망하고 상상한 질서들을 끊임없이 해체하기에 이른다. 인간은 과거를 통해 미래를 바라본다. 어느 옛날 시절에 내가 어떤 문제에 직면했었고 그것을 해결하지 못했다면 나의 남은 모든 삶에 그것이 문제가 된다. 자기 자신은 과거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과거는 확증적이다. 분명 존재했었던 현재이기 때문에 이것을 반성을 통해 타자화 시킨다는 것은 착각이다. 과거는 현재와 불가분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분명 존재했었던 현재이지만 엄밀하게는 현재라고 할 수 없는 모호함을 표방한다. 앞서 설명했듯이 내가 마주한 무수한 현실의 계기적인 요소들에 대한 모든 판단은 과거의 확증성에 기반을 둔다.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대상이 될만한 모든 존재자들에 대해 지배적인 정서를 제공해준다. 과거는 모든 편견과 고정관념의 원인이 된다. 


 과거가 현존재의 입장에서 극복해야할 대상이라면, 어떻게 과거 속에서 현재를 잡아두지 않게 되는가? 과거에 지배되지 말라는 의지적 명령이 수행되려면 어떤 식으로 과거를 대해야 하는가? 인식의 대상은 결국 그 대상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 간단하게 우리가 고장난 기계를 고치려면 그 기계를 속속들이 알아야 하듯이, 과거를 의식적으로 인지할 수 있어야만이 우리는 변할 수 있다. 우리 자신이 변화를 원하지만 무엇을 변화시켜야 할 지 모르는 것이 기억의 망각성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이다. 현재적 존재에게 과거는 탐구의 대상이다. 나의 의식이 뻗어나갈 수 있는만큼이 '나'이다. 내가 나의 역사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미래를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우리의 과거를 알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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