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이 발달하게 되면서 개개인 간의 소통은 더욱 원활해졌다. 가상공간을 통해 서로 다른 둘 사이의 물리적 간격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멀리 있어도 함께 생각과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은 시뮬라크르이지만 삶에서는 본질적인 질서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익명성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도 함께 떠안게 되었다. 그곳은 부정적인 자유가 팽배한 곳이다. 자신의 온갖 혐오와 불만을 여과 없이 펼쳐낼 수 있는 장은 그들에게 특별한 권리를 허용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정중함을 자신의 도구인 마냥 휘두를 수 있는 곳으로 변모했다.
개인적으로 정말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어쩌면 나의 모든 혐오감의 중추가 되어버린 인간의 심적 현상은 가학증이다. 타인에게 심한 욕을 뱉거나 또는 아무렇지 않게 상대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말을 아무런 스스럼없이 쏟아내는 사람들은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인가? 어떤 행위에는 결과와 책임이 따르지만 우선적으로 어떤 사적인 목적을 수반한다. 단순히 생존을 위해 음식을 먹거나 노동을 하는 걸 넘어서서 심적인 행위에서도 자기 자신이 해소하고 싶은 무언가가 무의식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그렇다면 가학적인 행위의 목적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온갖 다양한 형태의 가학증은 결국 본질적인 충동, 즉 타인을 완전히 지배하고, 그를 무력하게 만들어 자기 뜻대로 움직이고, 그에게 군림하는 절대적 지배자가 되고, 그의 신이 되고, 그를 마음대로 다루고 싶은 충동으로 되돌아간다. 그에게 굴욕을 주고 그를 노예로 만드는 것은,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고, 가장 근본적인 목적은 그를 괴롭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타인에 대한 지배력 중에서 남에게 고통을 가하고, 상대가 자기 방어도 못한 채 고통을 견디도록 강요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지배력은 없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을 완전히 지배하는 쾌감, 이것이 바로 가학적 충동의 본질이다. - Erich Pinchas Fromm <자유로부터의 도피> -
인간의 가학적 심리 성향에 대한 프롬의 분석이 논리적 비약으로 보이는가? 고작 인터넷에 댓글 몇 자 적는 게 정신분석에서 다루는 심각한 문제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런 댓글을 적는 사람들도 사회에서 얼굴을 직접 대면한다면 굉장히 정상적인 사람으로 행동하기에, 문제가 될만한 낌새를 발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에 존중이 결여되어 있고 굉장히 고독한 상태이다. 그들 본인이 스스로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그들의 무의식적인 말과 행위 속에서 얼마나 자신의 불쾌한 상태를 극복하고 싶은지가 드러난다.
우리가 윤리적이거나 또는 정의롭다고 할 수 있는 비판은 누군가의 권리를 손상시킨 일을 한 사람에게 향한다. 그런데 무작정 비난의 글을 적는 사람들이 표적으로 삼는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것이 아니다. 굳이 그들의 잘못을 생각한다면 열심히 살지 않았다는 것 정도이다. 그리고 가학적인 사람들은 최소한의 정의라 할 수 있는 말로,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내 자유를 지키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가학적이게 되면서 성취하는 건 자신의 우월감이다. 그들은 타인의 가치를 격하시킴으로써 나의 가치를 상승시킨다. 그런데 그런 행동은 자기 자신이 아무런 존재감 없이 살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성공이란 '나'와 자신이, 그리고 나와 이 세상이 어떻게 결부될 수 있는 지가 관건이다. 가학적 인간의 삶은 부재한다. 그들은 존중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소외된 채 자신의 삶을 잘 살아간다는 착각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 그렇기 때문에 항상 자기 자신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한 끝없는 회의를 반복한다. 그런 회의를 해소하는 방법으로, 즉 '나는 옳다.'라는 걸 확실시하기 위해 택한 방법이 가학증이다. 그들은 '나'와 세상을 결부시키기 위해 타인을 자신의 복종에로 편입시켜 자신이 옳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 문제적 방식은 타인의 불행에 의존해 있다. 그런 불행이 없다면 타인을 불행하게 만들면 그만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 이는 자신이 야만의 질서 속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에 불과하다.
특히, 더욱 애석한 건 가학성은 '나'의 존재방식을 거론하면서 타인에게 엄격함을 들이미는 것이다. 그들은 매정할지라도 타인이 잘못을 뉘우치는 데에 필요한 건 냉철함이라고 한다. 그들은 본인을 냉철하게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진정으로 타인을 이해했다고 할 수 있는가? 어떤 좋은 충고나 조언을 한들 타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을 친절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런데 그들이 들이민다는 건 고작 사회적 기준이다. 개인에게 전체적으로 할당되어 있는 사회적인 기준으로 한 개인의 성공과 실패를 구분하는 건 전혀 낯설지가 않다. 그런데 그런 기준을 자신만의 고유한 삶과 생각인 것 마냥 들이민다. 타인이 실패했다고 한들 나에게 아무런 실질적 피해가 없음에도 말이다. 그리고 자신의 공격적인 어투가 성장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위선으로 가학성을 포장한다. 그곳에서 '나'를 드러내는 것 자체가 자기 자신에게 굉장히 소원하다는 걸 의미한다. 정작 본인은 표상에 자신을 끊임없이 욱여넣으면서 자신의 공허를 가리려고 애쓰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아'다르고 '어'다른데 그런 사람은 한글을 다시 배워야할 필요가 있거나 아니면, 격려 한 마디 못해줄 바에는 무관심한 게 낫다. 하지만 그들은 무관심을 취할 수 없다. 내 존재의 고독과 결핍과 회의와 불만을 일시적으로나마 해소하기 위해서 나를 어떻게든 드러내야만 한다. 세상에 어느 누구도 존중받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가학적인 사람에게 필요한 건 타인의 존중을 통해 외로움을 해소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은 자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으면 관심을 끌기 위해 예쁜 짓을 하거나 아니면 떼를 쓰거나 투정을 부린다. 그들은 어린아이와 같다. 그들의 존재는 사랑받고 싶어 울부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