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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May 15. 2019

부러움의 무가치성에 대해서

자기기만과 허구적 만족감에 대해서

 '가치'있다고 여겨질 만한 것들은 사실 아무런 가치가 없을지도 모른다. '가치'는 존재적이다. 무언가가 값지다고 판단하는 것은 관념론적 주체가 살면서 습득하고 체현했던 느낌들에 의해 규정된다. 예컨대, '가정'을 갖는 일이 가치 있어지려면, 누군가의 어린 시절 속에 가정은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만약에 가정의 불화가 극심했거나 기억 속에서 온전함을 찾을 수 없는 사람의 경우, 그런 사람에겐 가정을 꾸리는 일은 그다지 큰 의미를 갖지 못할 수도 있다. 반대로 어린 시절의 결핍이 현재까지의 미련이 되어 화목한 가정을 자신의 이상향으로 삼을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는 후자에 비해 별다른 욕망을 갖지 않는데 내가 지금껏 본 사람들 중에선 후자가 많았다. 물론, 단순히 이런 것들을 단적인 원인으로 삼을 순 있을지라도 욕망의 총체성을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자신의 결핍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대상에 대한 부러움을 인지하는 것이다. 부러움이라는 기분은 자신이 그 부러움의 대상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만약 누군가가 갖고 있는 것이 나에게도 충분한 것이라면 타인이 부러울 이유가 없다. 그래서 자신의 부러움은 자신의 결핍을 밝히고 그 부족분에 대해서 욕망한다. 부러움의 감정은 욕망의 징표이다. 자본주의에서 만연한 부러움은 물신주의와 일치한다. 누군가 비싼 외제차를 몰거나 또는 더 좋은 집으로 이사를 간다거나 아니면 명품 옷을 두르는 것은 부러움의 표본이 되어 있다. 나보다 누군가가 훨씬 더 나은 삶을 살고 있다는 기준이 되어버린 물질적 재화들은 그 사람이 그만큼 더 많은 자본적 여유가 있다는 것을 드러내고 또한 그만큼 소비의 폭이 더 자유롭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런 것들의 추종은 현시대에서 가장 보편화된 욕망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삶의 불합리한 단면이란 희소성은 다수에 대한 동일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모두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순 없다. 욕망이 문제 삼는 것은 실현 가능성이다. 내가 얻고자 하는 바가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면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이든 충분히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이 문제시된다. 욕망은 불가능의 속성을 내포한다. 욕망의 정도에 차이가 있겠지만 모든 것들이 이루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속되는 실패의 경험과 결핍 속에서 만족은 허상의 뒤안길로 자취를 감춘다.


 자신에게 부러움의 대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족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런 만족은 기만적이고 허구적이다. 포도를 먹지 못한 여우의 일화는 욕망의 문제를 잘 보여준다. 여우는 높은 곳에 달려 있는 포도를 먹고 싶은데 자신의 힘과 여건이 부족해 그것을 성취하지 못한다. 욕망하는 대상을 얻지 못한 여우가 선택한 방법은 합리화이다. 저 포도는 맛이 없을 거라는 자기 최면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일단락시킴으로써 여우는 거짓된 마음의 평온을 얻는다. 여우는 포도의 가치를 낮추는 저열한 방식으로 자신의 무능력을 은폐하면서 자신의 가치는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았다. 문제는 여우의 사유는 미봉책으로 머문다. 언젠가 여우의 욕망은 다시 붉어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부러움의 대상이라고 할만한 표본들이 도처에 널려 있고 여우는 여전히 무능력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우는 사다리를 놓을 순 없었을까? 여우는 사다리를 놓을 힘이 없었을 수도 있고 사다리를 아예 갖고 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여우의 욕망은 자동적으로 소급된다. 하지만 욕망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자신이 원하던 것들을 이루지 못했던 과거는 현재의 소산이 되어 현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누군가가 미련을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는 건 이미 자신에게 미련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미련이 없다고 당당히 이야기하는 건 의지적 권리일 뿐이다.


 욕망의 저지는 경쟁 구도에서 너무나도 당연시된다. 하나의 대상을 둘 이상의 주체가 원하게 될 때 한쪽은 하나를 얻지 못한다. 경쟁에서는 우열이 정해진다. 한쪽이 우위를 점한다면 그렇지 못한 반대쪽은 열등해진다. 열위에 처한 사람은 무기력을 경험한다. 열등한 자들은 자신들이 욕망하는 대상은 여전히 부러움을 유발하지만 이 기분을 해소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여기서 두 가지 선택이 주어진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탓하게 되는 자기반성의 수립이거나 다른 하나는 외부에서 자신이 그르친 일의 원인을 찾게 된다. 전자는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깎아내리는 행위이고 후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을 포기할 수 없는 상태로 혐오의 대상을 찾게 된다. 더해서 부러움의 극치로서 드러나는 감정은 질투이다. 질투는 부러움의 내밀함을 바탕으로 쌓아 올려진 파괴성으로 타자의 소유를 불허한다. 이 상태에 머문 존재는 더 이상 자신을 비판하거나 비관할 수 없어 외부에서만 실패의 요인을 찾게 된다. 포도를 먹지 못한 여우가 포도의 가치를 깎아내리면서 자신을 지켜낸 것처럼, 욕망하고자 했었던 대상에 대한 가치 절하가 자기반성이 불가능해진 무력한 존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 된다.


 그런데 부러움의 대상은 어쩌면 자신에게 어떤 필요도 어떤 소용도 없을지도 모른다. 대체적으로 부러움을 유발하는 대상들은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 '사회적 좋음'이 결여되어 있을 때이다. 부러움의 대표적인 표본들은 이미지적이다. 많은 권리를 갖고 태어난 이들이 누리는 편안한 삶은 하나의 이미지로서 주어진다. 이를 바라지 않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다. 부러움의 지향적 삶은 이미 할당되어 있는 사회적 체계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 그곳에서는 타자의 욕망과 생존에 대한 욕구를 발견할 수는 있어도, '나'를 발견하기란 어렵다. 실존이란 '나'의 자발성에 기대어 있다. 나 자신에게서 '살아 있음'만으로도 유일한 의미가 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다면 '나'는 결핍과 허구적인 만족감에 허덕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허구성이 드러나는 순간은 피학적이거나 또는 가학적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자신의 공허를 감추기 위해 분노의 가면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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